기본적으로는 입시와 학교 성적, 개인적 흥미 분야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 것 같습니다.
현재 반수 목표로 2027 수능 준비하고 있습니다.
취향
학문 분야
물리학
흥미 주제
우주론
양자론
수리물리학
고전역학
학문 분야
천문학
흥미 주제
이론천문학
학문 분야
수학
흥미 주제
수학기초론
기하학
복소해석학
군론
학문 분야
화학
흥미 주제
무기화학
물리화학
유기화학
학문 분야
사회과학
흥미 주제
법해석학
사회주의경제론
페미니즘
젠더학
학문 분야
컴퓨터공학
흥미 주제
웹개발
파이썬
학문 분야
언어학
흥미 주제
일본어
라틴어
통사론
인공어
기록
시험 명칭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 과목
과목 선택
시험 성적
국어
화법과 작문
1등급
수학
미적분
4등급
영어
비공개
한국사
1등급
과학탐구
물리학 II
비공개
과학탐구
화학 I
5등급
응시 일자
2025년 11월 13일
제니카2024년제니카2024년제니카2024년Veritas2025년제니카2025년 12월제니카2026년 1월 1일제니카2026년 5월 18일Veritas2026년 6월 19일
서광 제0시국
인류에게 새벽을 가져다줄 존재, 연합정부의 시작입니다. 가장 먼저 제 0시국만이 존재하던 적에는 서광시국이라는 이름이 그저 그것을 상징하였죠. 그랬던 서광시국이, 연합정부의 형태로 발달하여 지금에 다다른 것은 제 0시국의 공일 것입니다.
인류의 서광, 신시대의 서광.
서광의 기 아래 모여 인류의 희망 노래하리라.
배경
세계수
수억 년을 살며 성력의 근원이 되는 나무입니다. 식물과 유사한 생명활동을 보이나, 엄밀한 관점으로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꽃을 피우고 광물과 닮아 있는 씨앗을 뿌리지만, 그 과정에 어떠한 수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죽일 수 없으며, 수명이 다해 죽어갈 때는 꽃이 피지 않고 가지가 빛을 잃어 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세계수가 강대한 시기에는 성력에 민감한 사람의 경우 성소 외부에서도 성력을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으나, 쇠약해지는 시기에는 세계수가 만들어내는 성력장뿐 아니라 성물이 만들어내는 성력장마저 약해져 성소 내에서도 성력을 다루기 어려워집니다.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세계수의 씨앗은 역세계수로 발아하고, 그로부터 나온 적대자마저 소멸해 가면 최후의 적대자로부터 신세계수가 태어납니다.
성물
크기와 색은 보석을 떠올리게 하고, 실제로도 빛을 발산하는 광물의 성질을 지녔으나 세계수의 씨앗입니다.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성력을 운용할 수 있게 할 정도로 강한 성력장의 근원이 되며, 성력장의 범위는 씨앗의 크기에 달려 있습니다. 성력장 자체의 세기는 세계수의 힘에 영향을 받지만 세계수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등 비정상적으로 약해졌을 때는 역세계수로 발아하여, 역성력장을 생성하고 적대자의 요람이 됩니다. 물리적 및 화학적으로 파괴하기 극히 어려우나, 강한 에너지를 집중할 경우 에너지를 모두 흡수하고 일시적으로 성력장이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외부 성력을 통해 정제할 경우 본래의 빛과 색이 유지되는 액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력
세계수로부터 비롯되는 힘입니다. 세계수뿐만 아니라 성물이나 성화 따위에서도 유발되지만, 그 모든 것의 근본적 원인은 그것들이 세계수와 상호작용함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의식적 및 무의식적으로 다룰 수 있는 힘은 아니지만, 성소에서만큼은 성력선속의 밀도가 높기 때문에 일반인도 성력을 다룰 수 있습니다. 세계수로부터 비롯되는 힘인 만큼 세계수의 상태와 직결되는데, 세계수가 강대할 때에는 성소 전체가 빛으로 뒤덮일 만큼 강해지지만 세계수가 쇠약할 때는 성력을 이용하는 기술들마저 운용하기 어려워집니다.
특징
서광시국
서광시국 연합정부
서광시국은 인류의 여명입니다. 시작은 이리도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고. 서광시국은 하나의 도시국가, 그것들이 모여 구성된 국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계가 적대자에 의해 지배되는 지금 현재, 인류의 요람이자 등불이라 할 것은 오직 국가뿐일 것입니다.
서광 제0시국
서광시국이라는 단어는 본래 연합정부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서광 제0시국이라고 불리우는, 이 국가. 그것 하나만을 가리키던 단어는 이제 모든 연합정부를 통칭합니다. 지금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제0시국의 희생과 공 덕분이죠. 따라서 연합정부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국가는 제0시국이지만, 아무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민간인들이 가장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 역시 제0시국, 우리들의 서광시국이니까요.
전투인원
제1전투인원
대적자와의 전투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전투에 나서게 되는 이들을 말합니다. 대적자와의 전투를 발생시켜도 되는 것은 제1전투인원뿐입니다. 서광시국 전투부가 이에 해당합니다.
제2전투인원
서광시국의 행정부와 연구부 직원들을 말합니다. 전투부처럼 적극적으로 싸울 수는 없더라도, 자신 한 몸은 충분히 지키도록 훈련받았습니다.
제3전투인원
전투가 가능한 민간인들이 제3전투인원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전투가 가능함은 대적자와의 전투에서 유효타를 조금이라도 낼 수 있다면 전부 해당합니다.
제4전투인원
부상자, 노약자 등 대적자와의 전투는 커녕 대인전투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이 제4전투인원에 포함됩니다. 일반적으로는 비전투 인원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 전투에 참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소속
행정부
기획과
국가의 모든 정책을 관리하고, 국가의 방향성을 결정합니다. 행정부뿐만 아니라 모든 부서 중 가장 중추가 되는 부서지만, 평균연령은 그리 높지 않은 편입니다. 연구부 부서들을 제외하면 가장 미래지향적인 부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법무과
입법, 사법, 법에 관련된 모든 일을 집행합니다. 그들은 가장 엄격한 심판자이자 곧 집행자이기도 합니다.
인사과
인재를 선발하고 그 선발된 인재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될 수 있도록 합니다. 대부분의 이들이 가장 바라는 위치이기도 하지만, 그런 만큼 다른 부서에서는 가장 꺼려지는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인사에 관여한다는 특성상, 다른 부서의 이들과 친교를 쌓지 않는 경우가 많아 더욱 그리 여겨지기도 합니다.
감리과
모든 부서들이 제대로 된 작용을 할 수 있도록 감시하고 관리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리 말단일지라도 감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사과와 더불어 다른 부서의 이들이 가장 좋아하지 않는 부서이자, 가장 가고자 하는 부서입니다.
전투부
지휘과
전투부의 제 1부서로, 모든 전투를 지휘하고 관리합니다. 주로 전투 경험이 많거나 전투와 관련하여 두뇌가 비상한 이들이 배치되곤 합니다. 전술전략을 담당하는 부서이기도 합니다.
수호과
적대자로부터 인간들을 보호하는 부서입니다. 지휘과와 달리 실무직에 가까운 편입니다. 가장 젊은 부서로, 사상자가 가장 많이 나오는 부서입니다. 적대자가 이 땅을 뒤덮기 전, 고대의 군대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격과
고대의 특수부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부서입니다. 수호과가 적대자로부터 민간인을 지켜낸다면, 유격과는 적극적으로 적대자를 공격해 물리칩니다. 그런 만큼, 수호과 다음으로 산재 발생률이 가장 높은 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용맹을 상징하는 명예의 훈장이지요.
치안과
국가 내의 치안을 담당합니다. 재해나 범죄를 담당하는 특성상 법무과와 연계하여 활동하는 일도 잦습니다.
연구부
자료과
연구부 전체를 통할하는 부서입니다. 국가의 모든 자료와 정보들은 자료과를 거치지 않고 유통될 수 없습니다.
분석과
적대자를 분석하고 대처 전략을 연구하여 수호과와 연계 활약을 펼치곤 합니다. 그러나 민간인들의 일반 생활에 관한 갖가지 통계 자료를 도출해내는 것 역시 그들의 일입니다.
개발과
항상 무언가를 발명하고 개량하는 것에 몰두하는 부서입니다. 대개는 적대자에 맞서기 위한 장비들을 연구하지만, 민간인들을 위한 용품들이나 연구를 위한 전문용품을 개발하는 때도 있습니다.
교수과
가르치는 일, 그것을 맡아 하는 부서입니다. 처음 선발된 인재들을 가르치는 일 또한 교수과에서 맡아 하고 있죠. 행정부의 부서들에 가장 많은 자문을 하는 부서이기도 합니다.
理想的인 世界에 對하여―理想論告
모든 生命體는 幸福을 窮極的인 目的으로 한다. 卽, 모든 生命體는 살아갈 目的이자 태어난 理由로 幸福을 갖는다. 生命體가 삶으로써 幸福을 追求하는 存在이므로, 生命體라면 幸福할 權利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떠한 特性을 가지고 있다는 理由만으로 幸福할 權利를 剝奪하는 것은 가장 嚴格하게 禁止된다.
幸福할 權利를 保障하기 爲해서, 知性이 있는 生命體에게는 追加的으로 自身의 일을 自身이 決定할 權利가 認定된다. 人間은 自身의 일을 스스로 생각하여 決定할 自由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決定을 外部로부터 平等하게 尊重받을 權利 亦是 認定되며, 生存에 對한 決定할 權利는 다른 權利에 앞서 保障된다. 그러나 人間 自身이 아닌 다른 人間의 일에 對하여는 決定할 權利를 行使할 수 없다. 卽, 決定할 權利의 濫用은 禁止된다.
窮極的 權利인 幸福할 權利를 保藏하기 爲해서는, 附加的 權利뿐 아니라 附加的 義務 亦是 必然的으로 發生하게 되는데, 이는 知性이 있는 生命體가 負擔할 수밖에 없다. 知性이 있는 生命體는 모든 生命體에 對하여 倫理的 考慮의 義務를 지니는데, 이는 合理的인 範圍 內에서 倫理的으로 보다 나은 決定을 내릴 것으로 期待되는 것을 말한다. 다만 恒常 倫理的으로 가장 優越한 決定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恒常 가장 優越한 狀態가 合理的으로 達成 可能한 狀態는 아니기 때문이다.
善과 惡은 幸福할 權利의 保障과 侵害와 關聯하여서만 意味를 갖는다. 幸福할 權利 以外의 모든 權利와 義務는 幸福할 權利의 保障을 위함이므로, 知性을 가지지 않은 生命體는 義務가 없어 善과 惡에 區別을 두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幸福을 향한 追求밖에 없다. 知性을 가진 生命體만이 義務를 違反하며 權利를 行使할 때 惡하며, 義務를 遵守하며 權利를 行使할 때 善하다.
知性이 있는 生命體는 幸福할 權利를 實現하기 爲해 社會를 建設하는 傾向이 있다. 이 社會 속에서 知性이 있는 生命體는 個人이라는 地位를 附與받고 社會에 對하여 義務를 가진다. 社會 亦是 個人에 對하여 義務를 가지는데, 個人이 決定을 平等하게 尊重할 義務를 갖는다.
個人은 社會 속에서 集團을 構成할 수도 있는데, 集團에 對하여는 決定에 따른 責任을 갖지만 義務를 가지지는 않는 特徵이 있다. 社會가 個人에 對하여 그렇듯, 集團에 對하여 亦是 平等하게 待遇할 義務를 가진다. 또한 社會와 構成員의 全部를 共有하는 集團이라 하더라도, 權利와 義務에는 干涉할 수 없다. 集團에서의 個人은 私的인 存在이며, 社會에서의 個人은 公的인 存在이기 때문이다. 社會는 個人에 대하여 集團과 달리 特別한 位置를 占有하기 때문에, 個人은 어떤 社會의 構成員으로 있을 것인지 決定할 權利를 가진다. 다만 集團에 대하여 集團을 構成하지 아니할 수도 있고, 複數의 集團을 構成할 수도 있는 것과 달리, 單 하나의 社會만을 構成할 수 있고 構成하여야 한다.
社會는 規律로써 個人 또는 集團과 관계를 맺는다. 規律은 個人 또는 集團의 行動과 個人의 權利를 制約하기 때문에, 반드시 個人들의 同意를 要한다. 社會 內에서 個人의 權利가 서로 衝突하는 때가 發生할 수 있는데, 同等한 狀況에서 서로의 幸福할 權利를 두고 鬪爭할 수 있다. 이 鬪爭의 範圍는 幸福을 위한 最小限으로 定해진다. 鬪爭은 同等한 狀況이 아니면 認定되지 아니하며, 鬪爭 외의 狀況에서 幸福할 權利의 本質을 剝奪한 자의 權利 역시 社會에 의하여 剝奪될 수 있다.
社會는 社會를 構成하지 아니하는 生命體와도 關係를 맺는데, 社會를 構成하는 生命體를 對象으로 特殊한 倫理的 考慮 義務를 지니는 것과 달리 一般的인 倫理的 考慮 義務만을 지닌다. 社會와 社會 間의 關係로는 크게 反撥과 協力이 있겠으나, 두 關係 모두 反撥 可能한 能力을 基礎로 形成된다. 反撥적이지 않은 關係라 할지라도 反撥 可能한 能力이 없는 境遇에는 하나의 社會가 다른 社會를 吸收하여 社會 內의 集團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社會에 있어서의 善과 惡은 幸福할 權利의 保障을 最大限으로 하는 狀態를 善으로 보고, 幸福할 權利의 侵害가 最大限인 狀態를 惡으로 본다. 그러나, 이는 單純히 算術的으로 權利가 保障된 程度와 權利가 保障된 生命體의 곱으로 計算되어지지 아니한다. 權利가 가장 많이 侵害된 이의 權利가 侵害된 程度를 最小限으로 하는 狀態를 善한 狀態로 보아야 하나, 이는 集團에서가 아닌 社會 全體에서만 成立한다. 正義로운 社會는 幸福할 權利를 모든 個人에게 保障하되, 自由를 可能한 限 가장 平等하게 制限하여야 할 것이다.
生命 | 科學的 意味에 包含되는 存在만을 對象으로 한다.
知性 | 現在를 基準으로 할 時 人間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幸福 | 身體的 滿足을 必要條件으로 가지며, 精神的 滿足을 充分條件으로 가진다.
權利 | 要求하거나 獲得하지 않아도 自然스럽게 附與되는 行動의 當爲性.
義務 | 要求하거나 獲得하지 않아도 自然스럽게 附與되는 行動의 必要性.
社會 | 基本的으로 統一된 政治 體制를 지닌 하나의 團體. 다른 社會에 抵抗할 수 있는 能力을 바탕으로 한다. 般的으로 國家.
集團 | 自發的으로 複數의 個人이 組織하여 만들어진 하나의 團體.
規律 | 權利와 義務를 調律하는 規則.
『理想抒情』 원고
잉크는 어쩌면 종이의 피
2023. 12. 16.
날카로운 만년필로 종이를 긁는다. 서서히 잉크가 배어 나온다. 종이가 긁히는 소리가 썩 좋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멈추지 못한다. 저 하얀 백지가 서서히 검게 물든다. 잉크가 번진다. 마치 자기 자신을 보듯 종이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만년필을 부러트린다. 부러진 만년필에서는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 이미 검게 축축해진 종이에서는 잉크가 묻어나고 있다. 나는 잉크는 어쩌면 만년필이 아닌 종이에 속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눈 물
2024. 04.
눈 물이 흐른다
주르륵 주륵
흘러넘쳐서 쏟아내진다
잠들지 않는다 안 하는지 못 하는지 모른 채로 바라보는 눈빛은 공허하다
슬픔은 슬픔으로 아픔은 아픔으로 공허한 눈동자 갈 길을 잃은 채로 마침내는 눈꺼풀에 숨는다
차갑지만 뜨거운 눈 물
기억
2024. 06. 28.
기억은 너무 자잘하게 남는다
기억은 백사장에서 놀다 옷에 낀 모래처럼 자잘하게 남는다
기억은 먹다 흘린 과자 부스러기처럼 자잘하게 남는다
기억은 깨진 거울의 유릿가루처럼 자잘하게 남는다
이렇듯 기억은 너무 자잘하게 남는다
자잘해서 상처를 준다 자잘해서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미 사라진 것이 너무나 많다 되찾을 수도 없이
물에 씻겨나간 모래처럼 입속에 삼켜진 과자처럼 깨끗이 치워진 유리처럼
자잘하지 않은 기억들은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기억은 너무 자잘하게 남는다
생존의무
2024. 08. 29.
살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다 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의지는 항상 왜곡되어진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왜곡의 주체는 사랑하는 이도 증오하는 이도 아닌 무관계한 타인도 무관심한 세상도 아닌 바로 나
나는 살고 싶다고 믿어야 한다 살고 싶지 않으니까 살고 싶다고 왜곡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 있어야 하는가 세상에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 삶도 역시 그런가
나의 의사를 무시하고 왜곡하고 침해하며 나는 오늘도 그렇게 살아 있는다
오늘도 그렇게 살아만 있는다
점
2024. 09. 15.
이따금 나는, 고향이 너무나도 그리워져서, 한 점으로 축소되고 싶다. 나도 모르는 어떤 날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점으로만 존재하고 싶다. 영영 내 의식 속의 한 점으로 존재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한없는 소실점마냥 멀리 떨어진 그것이 다시 내게 와 주면 좋을 텐데. 어쩌면 이 꿈은 한없는 저편에, 피안에 닿고 싶다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존재와 비존재에 무슨 그런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는, 단지 하나의 점이 되고 싶다고 하는 것에서.
번데기
2025. 03. 08.
나는 내가 고치 속에서 죽은 번데기 같다고 생각한다. 끝내는 성충이 되지 못하고, 고치 속에서 죽어버려 곪은 번데기. 고치를 까면 연약하더라도 성충에 가까운 무언가가 나오리라고 생각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썩어가는 애벌레만이 나오는 거다. 성충이 될 수 없다. 이미 썩어가고 있으니까. 벌레라면 죽은 후에야 썩겠지만 나는 어떤 연유인지 산 채로도 썩어간다. 산 채로도 썩어서 어른이 되지 못하고 그대로 학교에서 방출되고 나면, 죽은 애벌레 비슷한 사회부적응자로서 나는 나온다. 성인도 되지 않은 채 그대로 도태되어버린 것이 꼭 죽은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생각한다. 이대로 하루하루를 죽이다 때가 되면 고치에서 쫓겨나 그 반쯤 썩은 것이 드러나듯이, 때가 되면 학교에서 쫓겨나 그대로 도태된 채 썩어가는 내가 드러나고 만다. 죽은 벌레가 산 벌레가 되지 못하듯 나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점점 썩어가기만 한다. 산 채로 썩는다, 죽기를 바라면서.
심장을 꿰뚫린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한가?
2025. 11.
나의 심상은 모이고, 고이고, 조이고, 마침내는 뭉쳐져 심장이 되었다. 그런 심장을 꿰뚫는 것은, 이름 없는 존재.
심상은 시시각각 낡아 가고, 심장은 시시각각 닳아 간다. 심상이라 불리는 실존은 아픔도 슬픔도 모르지만, 심장이라 불리는 실체는 상처의 괴로움을 탄식한다. 그러나 나만의 실체는 나만의 것, 상처는 누구에게도 보여지지 않고 만져지지 않아 괴로움 또한 나 이외에는 가 닿지 않는다. 심장의 아픔, 심장의 슬픔, 어디에도 간데없이 내 안에서만 화해 스러지는 것. 타인에게는 그 존재조차 확실치 않은 것. 호흡과 호흡 사이에 가만 누워, 죽음에 녹아들어가는 심장을 본다. 꿰뚫린 심장은 나 자신과도 같아, 꿰뚫린 채의 나는 하릴없이 그저 심장의 상처를 애달파한다. 그 잠시간은 곧 영원이 되어, 영원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로, 단지 그런 채로 남는다.
나의 심장은 찔리고, 베이고, 찢기고, 마침내는 조각나 심상이 되었다. 그런 심상을 꿰뚫는 것은, 존재 없는 이름.
다꾸 백업
청색의 찬란
櫻坂46 Single
“광명이시여, 세상을 구원하소서….”
가 닿을 곳 없는 기도가 허공을 맴돌다 곧 흩어졌다. 클라우스트라는 금세 창공에서 시선을 잡아 내렸다. 떨어질까 아슬한 낭떠러지 아래 한때 지키고자 했던 대지가 있었다. 제가 멸망시킨 세상을 신이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꼴이 우스웠다. 그럼에도 클라우스트라는 괜히 맑은 하늘이 야속해졌다. 처음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꿈을 품고 떠났던 그날의 하늘, 처참하게 스러져가던 동료들이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 그날의 하늘,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원망할 수는 없었다. 원망할 자격이 없었다. 광명신의 구원을 소망할 자격조차 그에게는 없었다. 클라우스트라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라리, 운명이라고 했다면 좋았을 텐데….”
자기합리화일까? 적어도 클라우스트라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운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것 역시 그였기에, 운명에 기대어 편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것 역시 그였기에….
“운명을 바라고 있니, 아이야.”
클라우스트라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시선이 닿는 곳에는 그 어떤 생명체도 없었다. 한때는 생명의 땅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죽어버린 죽음의 땅,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 상황에서 클라우스트라가 목소리의 주인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이는 광명뿐이었다. 저를 알고 또 말을 전하고 싶어할 이. 그의 세상을 무너트린 저를 지독히도 증오하고 또 저주할 이. 그러나 그 목소리는 클라우스트라를 벌하고자 하지 않았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달콤한 이야기를 귓가에 속삭일 뿐이었다.
“광, 광명이시여…. 미천한 이가 광명을 뵙습니다.”
“나는 광명이 아니야, 그렇지만 네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렇게 되어 줄 수도 있지.”
눈앞의 공기가 흔들렸다. 그리고 순간, 땅의 종족의 형상을 한 이가 그곳에 있었다.
“…네프티스. 당신이 왜 여기에… 뻔뻔하게.”
목소리가 떨렸다. 한 음절 한 음절을 내뱉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분노가 치밀었고, 동시에 그런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가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분노가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이는 세계를 멸망시키고자 한 이였고, 세계를 멸망시킨 이였다. 세계—멸망자, 테네브리스 네프티스가 눈앞에 있었다.
“뻔뻔해? 아하하, 그것을 네가 내게 말하다니 재미있는 일이로구나. 너 또한 내게 협력한 것이 아니더냐. 너의 친우들, 그래, 클라비스라고 했던가… 모두 버려 버리고, 너는 나를 위해 훌륭히 일해 주었지.”
“당신 따위를 위한 일이 아니었어.”
“그래? 하지만 뭐, 상관없단다. 결과론적으로는 내게 도움이 되었으니. 아, 마치 운명처럼.”
“운명….”
“그래, 이제는 새로운 우주원리가 된 운명. 네가 조금 전까지 바라고 있었던 그것 아니니.”
“무슨 의미야, 그건. 운명은 실존하지 않는 개념이란 것, 당신도 알고 있잖아. 운명은 결과론적인 사고방식… 그래, 당신은 결국 결과론을 택했으니 운명론자구나. 하지만 그건 헛소리라는 걸 알아야 해. 정말이야. …아니, 당신은 나의 적.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우스운 일이지.”
“헛소리… 맞아, 헛소리였지. 얼마 전까지는. 그때까지는 나도 운명이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단다. 하지만 들어 보렴. 나는 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우주 원리를 무너트렸고, 세계를 멸망시켜 우주 원리를 재편했단다. 이 정도 말했으니 짐작하려나? 운명이란 말이야, 새로운 우주 원리란다.”
“…왜? 왜 그런 짓을 했어? 세계의 멸망이, 고작 그딴… 운명, 운명 때문이었다고. 세계를 구원하길 바랐던 그 모든 이들을 죽여 이루어낸 게 이 따위야? 그러면 안 되지… 그래서는…. 난 말이야, 당신이… 이것보다는 나은 이상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세계의 멸망을 막고자 했던 건, 당신의 이상 자체가 아니라 당신이 택한 수단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럴 수는 없는 거잖아. 우리들을 전부 쓰러트리고, 그렇게, 그렇게 이루어낸 게 고작….”
“우리, 라. 재미있는 말이네. 어쨌거나 그러는 너도 바라고 있지 않았니, 차라리 모든 것이 운명이기를.”
“…난 클라비스야. 나는 클라비스, 그러니…. 잠깐, 그 말은 이렇게 될 것이 운명이었다는 이야기야?”
테네브리스는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사실 테네브리스로서는 그럴 까닭이 없었다.
“너, 편해지고 싶구나.”
클라우스트라는 얼어붙었다. 꼴에 자존심이라도 있는 것인지 반박하고자 하는 말은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보다 더한 자기혐오가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테네브리스가 그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지만, 그는 굳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손끝만이 잘게 떨려 왔다. 마침내 숨이 닿을 정도로 테네브리스가 가까워지자, 클라우스트라는 그제서야 한 발짝 뒷걸음질 치는 것이 전부였다.
“결론을 말해줄까? 답은 부정이란다. 그래, 본래의 우주 원리가 그랬던 대로, 너는 자유의지와 운을 통해 이 자리에 도달했단다. 왜냐하면 네가 나를 도운 일은 우주 원리가 전복되기 이전이었으니까.”
‘그래, 편해져서는 안 돼.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품었던 것도 잘못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친구들을 죽음에 몰아넣고 세상을 멸망시켰던 것 모두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었는데, 그걸 운명의 탓에 돌리고 싶어서…. 이런 역겨운 속내를 그전까지 들키지 않은 게 놀랍다. 나는 용서받을 자격조차 없는데.’
“안쓰러울 지경이로구나. …거래를 하지 않겠니?”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신이 된 당신에게 이제 와서 뭐가 더 필요하다고? 내가 이번에도 당신과 협력하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뭐, 쉽게 말해 그렇지. 너는 거절하지 못할 거야.”
“대체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군. 나는 이제 당신이 나를 그 어떤 운명에 밀어넣는다 해도 상관 안 할 생각인데. …이제는 죽을 생각도 살 생각도 없거든.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 내가 만들어낸 것이 고작 이 따위의 세계라면.”
“왜냐하면 내가 제시할 대가는 부활이거든. 네가 저버린 아이들이 한 번 더 살아 숨쉴 수 있게 해 주지.”
“…그게 가능하다고? 당신이 어떻게….”
“나는 신이 되었으니까. 이제 나를 광명처럼 대할 마음이 들었니?”
테네브리스는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러나 클라우스트라의 얼굴은 차가웠다. 냉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하고 있거나 또는 정반대로 체념한 이의 창백한 표정. 그런 그의 태도는 테네브리스의 흥미를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됐어, 그런 건. 당신에게 광명께 하는 것처럼 대할 일은 영원히 없어. 내게 뭘 원하는지나 말해.”
“네가 내게 그동안 숨겨왔던 단 하나의 비밀, 너의 동기. 그것을 바치고 나를 신으로 섬기려무나.”
‘…거짓말. 부활의 대가가 고작 이거라고? 수상하다. 테네브리스는 다른 이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는 성정이 아냐. 그렇다면 왜지? 내가 대체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거지?’
“네 손으로 짓밟은 친구들의 생명은 별로 절박하지 않은 거니? 아니면 나를 믿지 않는 거니?”
“당신이라면 믿겠어?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생각해 봐.”
“왜 믿지 않는지 잘 모르겠군. 때로는 호의를 받을 줄 아는 것도 미덕이란다.”
“…정말 온전한 삶을 줄 수 있어? 당신에게 이용당하기만 하는, 그런 인형 따위가 아닌 진짜 생명을 돌려주겠다는 거야?”
“아, 그런 쪽의 걱정이었나…. 두려워하지 말렴, 그들은 죽기 전과 동일한 상태로 온전히 부활할 거란다.”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부당 거래라 해도 어쩔 수 없어. 그 애들을 살려낼 수만 있다면… 비록 이것이 후회하게 될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지. …테네브리스, 그 머리 하나는 정말로 영리하네. 그러니 하나의 세계를 무너트리고 그 대가로 신이 되어 이런 권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좋아…. 그렇다면 거래하지.”
[암흑이시여, 부디 생이 다하기 전의 시간으로, 그들을….]
테네브리스는 웃었다. 소리 내어 한참을 웃었다…. 클라우스트라는 그 웃음이 어쩐지 멀어져 가는 듯하다고 느꼈다. 그리고서는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고, 모든 것에 현실감이 없어진 후에는, 마침내 암전.
아무렇게나 방치된 들판의 한켠, 시체는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시체 네 구였던 것은 곧 엘프 한 명, 요정 한 명, 인간 한 명, 마족 한 명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 있고 생각할 수 있음을 납득하지 못했다. 그들은 시체는 사고할 수 없음을 근거로 들었다. 영혼 없는 육신은 어떠한 행위를 하지 못한다. 고도의 두뇌 작용이 필요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들은 그 사실이 당연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당연함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된 때, 그들은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들이 들판에서 깨어나기 이전 마지막까지 살았던 세상은 법칙이 법칙이고 원리가 원리이던 자명하고 또 합리적인 세계였으므로. 앞뒤가 뒤집히고, 문명이 멸망한 세상은 그 네 명 중 누구도 살아 보지 못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글쎄요…. 아무래도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그게 가능해?”
“원천적으로는 불가능하죠…? 하지만 살아 있네요. 신기해라…. 그러고 보면, 여기는 대체 어디일까요?”
“음… 들판?”
“아하하, 그런 무의미한 대답 말고요. 행정구역이든, 좌표로든 말이에요….”
“글쎄요… 저는 오히려 시점이 궁금합니다. 결전 이후로 몇 시간쯤 지났다면 이런 날씨일 리가 없습니다. 16월이라기에는 너무 날씨가 좋은 듯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야. 왜냐하면 우리가 죽었다는 건 곧 우리가 패배했다는 것, 그렇다면 세계가 멸망하지 않았을 리 없어. 우주 원리가 바뀌었다면… 꼭 16월이 겨울의 끝이란 보장은 없지.”
“뭐랄까, 자신만만하네…. 우리가 아니더라도 세계가 멀쩡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기는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신탁…이 있었으니까요, 클라비스를 구성하도록 만든.”
“그 신탁대로라면 우리 외에 세계를 구원할 자는 없었다, 이건가? 그렇다면 정말로 멸망 후의 세계일지도 모르겠네.”
“공간도, 시간도 무엇도 파악할 수 없다니… 마법으로 그런 건 파악할 수 없을까요?”
“있을 리가. 오히려 마법은 공간 좌표와 시간 좌표를 필요로 하는 편에 가깝지, 도출해 주지는 않아. 신성력으로는 안 되는 거야?”
“기본적으로 안 되는 것은 둘째 치고… 신성력이 사라졌다는 게 문제예요. 신성력을 다루기는커녕, 신성력을 요구하는 스킬도 전혀 발동되지 않고요.”
“뭐, 정말이냐?”
“예, 저도 그렇습니다. 신성력을 전혀 다룰 수 없더군요. 루멘에 깃들어 있던 신성력도 사라졌습니다.”
루멘은 광명이 직접 그에게 선사한 한 정의 활로, 그 루멘마저 신성력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네 아티팩트에는 광명께서 직접 신성력을 부여하신 것 아니었어?”
“그렇습니다만… 어찌 된 일인지 전혀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세계가 멸망해서 우주 원리가 변했다는 쪽이 더 그럴듯하네.”
“부활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일까요?”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죽음과 삶, 혹은 정방향의 시간이라는 것마저 우주 원리의 일부분이었을 테니.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만 부활하는 건 이상해.”
“그러게…. 죽은 자리에서 부활한 것도 아니야. 이곳은 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곳이지. 여러모로 이상하네.”
“그 분이 없는 이유도 혹 그것과 관련되어 있겠습니까?”
“그 분? …아. 정말 그 녀석은 어디 있는 거지?”
“이상하네, 우리만 되살아난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면 떨어진 다른 곳에서 부활한 걸지도요.”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낫겠습니다. 위치도 파악하고, 그 분도 찾을 겸 말입니다.”
“이왕 찾을 거라면 흩어지는 편이 좋겠네. 해가 질 무렵에 다시 모이자.”
그러나 한참을 둘러보아도 그들 외의 땅의 종족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사고할 필요가 없는 동식물들만을 찾을 따름이었다. 들판과 이어져 있던 숲에도, 반대편의 호수에도 그는 없었다. 다만 숲 반대편에 마을 있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어떡할래?”
“저기에 그 녀석이 있을까?”
“별로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네요. 애초에 무작정 찾는다고 나올 걸 예상하지도 않았잖아요?”
“그렇네,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렇게 그들은 숲으로 향했다. 어두워진 숲속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곧 그들은 마법으로 불을 밝힐 수 있었다. 불을 보고 달려드는 짐승들을 상대하는 것도 오러를 사용하니 금방이었다.
“정말 이상하네. 세계를 떠받치던 힘 중 신성력만이 사라졌어.”
“마력도, 기력도 남아 있네요.”
“그래, 물리력은 사라질 수가 없었지. 하지만 그렇다면 왜… 신성력만이? 그것도 우주 원리가 변한 것과 관련되어 있나?”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성력은 모두 광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광명이라 하시면 가장 우주 원리에 밀접하게 닿아 있는 존재이시니까요….”
“어쩌면 광명께 변고가 생긴 것일지도 몰라요.”
“저는 따로 어떤 느낌 받지 못했습니다마는… 그것은 제가 그 사이 죽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주 원리가 뒤바뀌었기 때문에… 광명께서 힘을 쓰시지 못하게 되었다, 라는 건가?”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앗, 뒤쪽에 마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루멘을 무작정 휘둘렀다. 스며져 있던 신성력은 사라졌지만 그 단단함은 여전해서, 졸지에 그는 화살 없는 활만으로 마수를 때려잡게 되었다.
“와… 큰일날 뻔했네. 네가 루멘을 둔기로 사용하는 건 처음 봤어.”
“이제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신성력을 쓸 수 없으니… 무기의 새로운 활용 방안을 찾아야지요.”
“대단하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야. 마수가 나온다는 건… 아스달부르크라는 이야기인데, 나는 이런 곳을 전혀 모른단 말이지?”
아스달부르크, 천옥 대륙이라고도 불리는 곳. 모든 마족들의 고향이자 대부분의 마족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던 곳이었다. 그곳은 네 대륙 중 유일하게 마수가 거주하던 지역이다. 그는 엘프들의 땅 천년 대륙으로 향하기 전까지는 마신의 후예답게 천옥 대륙에서 거주했었고, 천옥 대륙의 모든 곳을 빽빽하게 알고 있다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럼 두 가지네요. 우주 원리의 변동과 함께 각 대륙의 지형이 변했거나, 우주 원리의 변동과 함께 마수의 서식지가 변했거나.”
“마수는 환경만 맞으면 자연 발생하니까, 마수의 서식지가 변했다는 건 각 대륙의 기후가 변했다는 의미겠지.”
“글쎄, 대륙의 지형뿐만 아니라 대륙 자체가 변했을지 몰라. 네 개의 대륙이 있음을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잖아?”
말을 마치며 반 바퀴 돌아 바스타드를 던졌다. 명중했는지 저 너머 퍽 소리와 함께 짐승의 비명이 들렸다. 불빛을 보고 무작정 달려드는 짐승들은 오러를 통해 한 차례 쫓아낸 바였으나, 계속해서 마수나 짐승들을 마주치곤 했다. 숲은 생각보다 넓었다. 저 너머의 마을은 조금 전부터 시야 끄트머리에 보일 뿐, 점점 가까워지는 기색이 없었다.
“뭐야, 길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저 마을은 계속 저기 있는 거냐?”
“글쎄… 미로 같은 방식이려나? 잘 모르겠네. 하지만 역시 빙빙 돌아가는 것 같아….”
“마법으로 불태우면 안 돼?”
“숲을 불태우실 생각이에요? …저런 말 들어주시면 절대로 안 돼요! 자연환경을 파괴하라니….”
“걱정 마, 그 말대로 할 생각은 없어. 자연환경 파괴 문제는 둘째치고, 숲의 형태도 모르는데 무작정 불태우면 어떻게 될지를 내가 모르겠다.”
“이런, 어쩔 수 없네. 하지만 정말로 방법이 없냐? 이대로 걸으면 한밤중에 도착하겠단 말이지.”
“예상 도착 시간이 그렇게 늦어진다면 숲에서 야영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렇기는 해. 네가 봤을 때는 거리가 어때 보여?”
“별로 멀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건 출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나….”
클라우스트라는 눈을 떴다. 분명히 머리 위 동남쪽에 해가 떠 있던 것을 기억하는데, 금세 해는 저물고 박명만이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눈앞의 테네브리스도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가 있는 곳은 쓰러지기 전과 마찬가지로 낭떠러지의 근처였는데, 잘못했더라면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꺼림칙해져 버렸다.
“어떻게 된 거지…. 거래는… 이행된 건가? 알 수가 없네.”
“거래는 이행되었단다.”
“네프티스? 어디에 있는, …아. 어차피 이제는 내 앞에 실체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건가?”
“금세 깨닫는구나. 그래, 나는 신이 되었으니… 신의 권능으로 너와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야.”
“끔찍해라. 당신이 신이 되었다는 건 나의 비밀을 애써 내게 캐물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는 것 아닌가? 왜 내게 그런 걸 요구했지?”
“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신앙하는 자의 의식에 개입하는 것이지, 불신자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란다.”
“그건 새로운 우주 원리에서도 동일한 건가? 워낙 많은 것들이 변하기에,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동일하더구나, 아쉽게도. 하지만 읽을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어. 네가 나를 신으로 섬기는 순간 너의 운명을 내게 비밀을 털어놓는 운명으로 개편하면 그만이니까.”
“당신을 신앙해야 하는 거지?”
“그래, 운명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모든 질문에 답해 주는 내가 참 친절하지 않니? 거래의 일부이기도 한 만큼, 제대로 섬길 생각을 해 보려무나.”
“…궁금한 게 있어. 내가 당신을 섬긴다고 해도, 클라비스, 그들은 너를 섬기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부활시키는 거지?”
“똑똑한 줄로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은 거니? 생각해 보렴, 이전의 우주 원리에는 운명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광명이나 그 힘을 빌린 자는 땅의 종족을 부활시킬 수 있었어.”
“아…, 시간의 역행. 그래, 참 친절하시네. 이렇게까지 전부 답해 줄 줄은 몰랐다.”
“뭐, 거래의 연장선이지 않니.”
“거래….”
클라우스트라는 단어를 짓씹듯이 내뱉었다. 테네브리스는 그것을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 이상하게도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클라우스트라는 저도 모르는 사이 그 대가가 지불된 것인지, 아니면 테네브리스가 적당한 시점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바라보고 있던 낭떠러지 아래, 분명 아무도 없었을 마을에 빛이 들고, 소리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작정 뒤로 돌아 내달렸다.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 것인지,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갑자기 마을이 나타난 건지 짐작 가는 거 있어?”
“전혀 없습니다. 제 시력에 이상이 왔는지 급격히 의심되는군요. 거리는 분명히 계속 일정해 보였습니다.”
“정말이지, 뭐에 홀린 것 같네. 마법이라도 되는 거냐.”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이런 건 못 해. 마술이라면 모를까.”
“마술…. 라비린토스의 본거지라도 숨겨 놓은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마침 들어오자마자 불도 환하게 되었으니, 뭐라도 찾아보자고.”
“라비린토스의 본거지가 의심되는 상황이니만큼, 함께 이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잠깐, 저쪽에서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요?”
손끝으로 마을의 한구석을 가리키며 물었다. 다른 이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원체 다른 이들보다 청력이 좋은 요정이었으니 그 잠깐의 바스락 소리 듣지 못할 것도 없었다. 대답이 나오는 것보다 발걸음을 떼는 것이 빨랐다. 클라비스는 전쟁을 겪으며 반사적인 대응을 본능처럼 학습하게 된 것이었다.
“라비린토스 녀석일까?”
“글쎄, 그 애일지도 모르지.”
“민간인이라 하더라도 확인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요정은 물론이고 귀 어두운 인간조차도 뚜렷하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금속음이 나는 병기는 구식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웬만큼 신식인 병기는 장전음조차 하나 나지 않았고, 꼭 신식이 아니더라도 마법이나 신성력을 사용하는 경우라면 소리를 죽일 수 있었을 테다. 그러니 그것은 구식 병기를 가진, 어떤 마력이나 신성력도 가지지 않은 자라는 의미였다. 물론 그것이 기를 다루지 못한다는 의미는 될 수 없었지만, 기를 다루는 이라면 냉병기류를 주로 사용했으면 했지 화기를 사용하는 일은 적었다. 그래서 클라비스는 통상적 전투에서의 긴장 상태를 유지할 뿐, 특별히 긴장할 만한 상황으로는 여기지 않았다.
“멈춰.”
“…아.”
그리고 그들이 목격한 것은 예상에서 한참 벗어난 모습이었다. 소리친 마족을 뒤돌아보는 클라우스트라의 모습, 그리고 그가 겨냥하고 있던 테네브리스의 군단장.
“잘도 한눈을 파는군.”
군단장의 공격은 빨랐고, 클라우스트라는 클라비스와의 만남에 당황하여 그것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클라우스트라는 조금 전 클라비스가 마을로 진입했다는 것을 깨닫고 멀어지고자 달렸다. 그는 죄책감으로부터 패배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눈앞에는 마을이 있었고, 반대편으로 달렸지만, 다시, 또다시, 마을. 그리고 군단장을 발견했다. 클라우스트라는 그로부터 이 사실이 군단장의 소행이라고 추론했다. 그리고 클라비스는 클라우스트라를 발견했다.
“피해!”
아까의 장전음에 걸맞은 발사음이 들렸다. 그러나 그 탄환은 눈먼 채로 한없이 나아갈 뿐이었다. 클라우스트라는 군단장을 바라보았다. 피할 기회는 이미 제대로 조준하지도 못한 총을 쏘는 것으로 날려버린 참이었다. 연이어진 공격이 쇄도해 왔다.
그러나 그 공격에 맞는 일은 없었다. 클라비스는 클라우스트라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검을 휘두르고, 화살을 날리고, 바스타드를 들어 날아오는 공격을 막았다. 클라우스트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을 배신하고, 또다시 도망쳐 버린 자신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하는 동료들…. 할 수 있는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괜찮아요?”
“피하지도 않고, 멍청하게 뭐 하고 있던 거냐.”
“조심하십시오. 매우 강한 자로 보입니다.”
‘왜…?’
그런 의문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저를 보던 친우들의 마지막 눈빛을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그런 눈빛을 받아 마땅하다 여겼는데. 용서받을 만하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두려워 도피하던 것이기도 하고, 도피하였기에 더욱 그것이 두려워진 것이기도 했다. 클라우스트라는 그럼에도 입을 다물었다. 결국 말할 수 없는 질문이라면 스스로가 온전히 삼켜낼 수 있기만을 빌었다.
시야를 차단하는 마법쯤은 공간 이동에 비하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야를 차단하는 것뿐 아니라, 감각 전반을 약화하는 데 쓸 수 있을 정도로 마력이 남았다. 그런 때에 맞추어, 대검이 휘둘러졌고, 검에 실린 기는 군단장에게 가 닿았다. 군단장으로부터 역으로 날아오는 공격은 화살에 맞아 흩어졌다. 군단장이 한 발짝, 주춤하는 순간 화살이 그의 목 옆을 스쳤다. 온몸을 두르던 마력이 흩어진 지 오래임을 깨달은 군단장은, 흐리기만 한 눈앞을 애써 응시했다.
[암흑이시여, 제게도 빛 내리소서.]
군단장의 나지막한 읊조림에 클라비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라졌던 신성력, 그것이 클라비스의 눈앞에 있었다.
“신성력… 쓸 수 있었던 건가요?”
“글쎄요, 제게는 아무런 느낌도… 신성력이라면 응당 느껴져야 할 그것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모방이라 할 수 없는 신성력에 틀림이 없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그럴 때가 아냐. 저 녀석, 감각이 돌아온 건지 뭔지, 반응이 기민해졌네.”
“아마 그게 정말로 신성력이었다면 그걸 이용해 시각 차단을 풀었겠지. 원래는 타인의 마법을 파훼하기란 힘든데, 머리를 잘 썼어….”
“이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죠?”
“신성력까지 쓸 수 있었을 줄이야…. 우리에게는 불가능해진 것을 자유롭게 쓰다니. 우주 원리의 개편 탓인가.”
“오러를 통해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어?”
“가능은 하지. 상대가 대비하지 않았을 때만, 일시적으로….”
“그렇다면 발을 묶는 건 포기할게. 오러가 그나마 먹히는 듯하니 방어로 전환. 대검보다는 바스타드나 레이피어로 대적하는 편이 낫겠으니 화살로 엄호하며 공격에 조력해.”
“그러지.”
그 뒤로는 몇 분간 사투만이 있었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고, 회피하고, 금속음이 났다. 몸의 움직임과 함께 공기가 춤을 추었다. 도주 직후의 전투인지라 클라비스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고, 군단장은 신성력을 빌어 계속해서 회복하고 있었다. 클라우스트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비효율적으로 전투하느라 체력이 빠르게 소모된다. 대신 싸울 수 있는 이가 이쪽은 넷이니… 한 방에 끝낼 수 있다면 좋겠는데. 예전에 싸울 적에는 좌표를 알았었지… 신성력도 있었고. 그때보다는 인력도, 장비도 잃었으면 잃었지 얻은 것이 없다.’
“순간은 가능하다고 했었지, 잠깐이면 돼. 마력 화살도 상관없지? 이제는 신성력도 없으니 괜찮을 거야, 아마. 화살에 마력을 실어 파괴력을 높여 줘. 한 번에 급소를 노려야 하니 시선을 분산해.”
한순간에 온갖 무기가 날아들었다. 화살과 레이피어, 대검이 동시에 군단장을 향해 찔러 들어 왔고, 군단장은 느껴지는 오러에 멈칫하고야 말았다. 화살이 그의 심장 부근에 가 박히는 것도 마찬가지로 한순간이었다. 그와 함께 군단장의 주위에 모여 있던 마력이 흩어졌고, 클라비스는 방심하지 않았다. 대검이 한번 휘둘러진 후에는 군단장의 목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손끝의 옅은 떨림, 즉 경련이 가시고 군단장은 차가운 시체로 떨어졌다.
“하… 겨우 끝났네.”
“미안해요, 이번에는 아무런 도움도….”
“어쩔 수 없지, 신성력은 쓸 수가 없어져 버렸으니까. 그게 네 탓은 아니고.”
“네… 그렇지만.”
“괜찮습니다. 결국 아무도 죽지는 않았으니까요. 모두 무사합니다.”
“맞아, 나도 이번에는 손목 안 다쳤다고. 멀쩡해, 정말.”
“정말 멀쩡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고전했는데. 말로만 그러지 말고 손목 줘 봐요.”
“진짜로 안 아프다니까? 거짓말 아냐, 이것 봐. 잘만 돌아가잖… 아얏!”
“뭐예요, 진짜. 멀쩡하지도 않으면서…. 다들 괜찮다고 말만 하지 말고요.”
“아하하, 나는 진짜 멀쩡해. 그렇게 무식하게 싸우는 누구만 아픈 거지?”
“웃기고 있네, 너도 무리했으면서. 어깨 한번 돌리면 비명 지를 거잖아?”
“아니거든, 봐, 부드럽지? 전투는 이렇게 하는 거다.”
“이렇게는 무슨.”
피식, 하는 짧은 헛웃음을 내뱉고는 손가락을 뻗어 옆구리를 가볍게 찔렀다. 그러자 아야야야, 하는 옅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참나, 결국 멀쩡할 리가 없죠. 다들 바보처럼 뭐 하는 거예요?”
그래, 클라우스트라의 친우들은 늘상 이리 유쾌해지던 이들이었다, 그가 망쳐버린 예전의 기억 속에서도 그들은 그러했다. 때때로 진지해지던 때도 있었지만, 세계를 구한다는 사명을 아무렇지 않게 지고서는 즐겁게 웃던 이들. 그래서 클라우스트라는 웃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굳은 표정을 그대로 내보일 수도 없어 몸을 돌릴 뿐이었다. 그러나 클라비스는 그들을 등지고 섬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쪽에 뭐 있어?”
“…아, 아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의 미묘함은 아마 클라비스 그들도 모두 알았으리라. 애써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배려일까? 클라우스트라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서, 그 녀석은 어떻게 신성력을 썼다는 거냐? 너희들은 이제 못 쓴다며. 진짜로 신성력이야?”
“예, 확실합니다. 조금 전 말씀 드렸듯 그것은 신성력입니다.”
“암흑이시여, 라고 했었죠, 분명.”
“그것이 특이점인가. 우주 원리가 그런 쪽으로 개편되었는지 모르겠어.”
우주 원리. 그 단어를 듣자, 클라우스트라의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운명. 클라우스트라는 문득 어째서 클라비스가 승리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군단장이 모시던 암흑신. 그는 분명 클라우스트라에게 신앙을 요구했던 암흑신일 테고, 그렇다면 필히… 군단장에게 승리하는 운명을 지어줄 수 있을 텐데도. 무엇을 위해 클라비스의 승리를 방관했는가, 클라우스트라는 그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신성력의 정체뿐이었다.
“신성력이라 함은, 신이 하사한 힘이겠지.”
“신이 하사한 힘… 광명께서 하사하신 힘. 그래, 그렇지.”
“아니, 그렇지 않아. 두 가지는 일치될 수 없는 것. 광명께서도 신의 하나셨을 뿐이야. 광명께서 내리신 그 신성력은 신성력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는 포함되는 관계에 불과해. 너희들이 사용하던 것은 광명께서 내리셨던 그것이겠지.”
“맞아요, 그렇지만 그게… 아, 이해했어요. 우리들의 패배로 결국 광명께서는 힘을 잃으셨다는 것이죠…. 그리고 우주 원리가 개편되었으니. 그 신의 힘을 이제는, 광명께서 행사하시지 못하니 다른 누군가 행사하게 되었겠네요. 그리고 그는… 군단장이 언급했던 암흑, 일 테고요.”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말이 되는군.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우리들은 광명을 섬길 수는 있어도 다른 이, 다른 신을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죠.”
“…복잡하구만, 참. 그래서 무슨 말이냐?”
“쉽게 말씀드리자면… 저희가 패배하고 그로 인해 세계가 멸망했다는 것쯤은 추론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이로부터 우주 원리의 변동을 유추했고, 그 사이에 광명께서 힘을 잃으셨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광명을 대신할 존재, 암흑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광명께 경배하지 암흑에게 경배하지는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지금의 신성력을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군단장이 모시는 암흑신이라면… 누굴까요? 그자가 테네브리스로 하여금, 이 세계를 멸망시키도록 한… 악신일까요.”
‘암흑신은, 테네브리스. 테네브리스는 테네브리스 자신으로 하여금 이 세계를 멸망시키게 한 셈이지… 그러나 그때는 암흑신이 아닌 채로. …내가, 이 사실을 내뱉어도 될까? 이 애들에게 이걸 말해주어도 될까? 그가 계약의 대가를 언제 받아 갈지도 모르는 지금… 이것들을 전부 말해주어도 되는 걸까. 이것을 말해준다면 다른 것은 말하지 않을 수 있긴 한가? …정말 한심하네, 치부가 드러날까 두려워 돕지도 못하고 있는 꼴이란…. 누가 보면 비웃겠어, 아니, 나라도 내가 비웃기는군.’
“광명께서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계셨을까. 어쩌면… 직접적으로 우리를 돕지 못하셨던 것도 암흑 때문인지 모르겠군.”
‘…그럴 리가 없어. 아직 신이 되기 전의 테네브리스라면, 충분히 광명께서도… 하지만 정말로 이해가 되지를 않아. 어째서? 어째서 모든 것을 방관한 거지? 대체 내가 모르는 무얼 알고 계셨던 거지?’
“이것 참, 어렵네. 그분의 심중을 헤아리는 건 항상 쉽지가 않아… 폐하 덕에 사람의 심중을 파악하는 데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지만, 신의 심중을 파악하는 지경은 높기만 하네.”
“뭐, 모두에게 그럴 겁니다. 제게도 광명은 어려운 분이시니까요.”
“정말로요?”
“예, 저 또한… 그분께 편히 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뭐랄까, 의외네. 그냥 네가 예의 차린다고 생각했지, 어려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도 그럴 게, 함께한 시간이 얼마냐.”
“그렇긴 합니다만, 시간으로만 모든 것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그리고 함께한 시간 또한 제게나 반생을 넘는 기간인 것이지, 그분께는 찰나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취를 감추신 그분이 그립습니다. 단순히 신으로서의 힘을 잃으신 것인지, 광명이라는 개념과 함께 월금신 그분마저 함께 사라져 버리신 건지, 저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죠. 그분의 힘이 더는 느껴지지를 않으니, 그분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 어째서 테네브리스 그 녀석만이 명백히 살아 있는지. 너희의 소중한 이들은 모두 생사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와중 왜 그 녀석만이 목숨 부지하기는커녕 우리의 목숨을 잡고 서서, 그렇게 강대하게도 존재하는지.”
“가족들은… 잘 있을까요. 친구들도, 전부 호신술 정도밖에는 못 하는 학생에 불과한데, 지금은….”
“글쎄, 나라부터 건재할 리가 없으니, 무엇도 보장할 수가 없지. 살아남은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 아니 살아남은 이들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세계가 멸망해서 정확히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그래도 군단장이 살아 있던 걸로 봐서는… 세계 멸망이 땅의 종족의 멸종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지만요.”
“맞아, 그렇네. 그럼, 생존자라도 있는지 확인하는 게 어떻겠냐?”
“생존자? 좋은 생각이야. 이 멸망한 세계에서라도, 우리가 할 일 하나 있다면… 그것이 세계를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세계에 남겨진 이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해내야지. 세계를 구원하려고 모인 우리 클라비스는.”
“뭐냐, 그런 멋진 말은. 단장이 해야 하는 거 아냐? 남의 말 막 뺏네, 완전. 제1의 클라비스면 다다, 이거냐?”
그 잠깐의 진지함도 순간인 듯이 모두들 웃었다. 클라우스트라는 옅게나마 미소 지었다. 제가 마냥 친구들의 사이에 껴서 웃고 있어도 되는지, 그런 질문들이 속에서 치고 올라왔지만, 그는 무시했다.
‘웃을 수 있다면 웃고 싶어, 웃고 있어야 행복해지니깐.’
“그런데, 우선 지금 어딘지를 알아야 방향을 정하지 않겠냐. 여기는 어디야? 어, 뭔가 아까도 했던 질문 같네.”
“음, 제가 했었던 질문이었죠, 아마.”
“그런 걸 기억해? 역시 세기의 천재는 다르네.”
“세기의 천재면 뭐 해요, 세계는 결국 멸망했는데. 이 머리는 아무런 도움도 못 됐다구요.”
“뭐—,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런가요, 아하하. 하지만 정말로 아까 전 말했듯, 대륙 자체가 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 국가조차 존속이 불확실한 지금, 행정구역의 파악은 무리인 것 같아요.”
“그럼 결국 발걸음 닿는 대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거냐.”
“그렇게 생각하니 막 출전했을 때 같아. 그때도, 뭐, 여러 가지 한계가 있으니까, 이렇게 발걸음 닿는 대로 탐사하곤 했었지. …차라리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아하하,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네.”
평상시 클라비스의 현실 감각을 담당하던 그답지 않았다. 이야기가 지상을 떠나 창공에 발 내딛으려 할 때 그것을 붙잡아 땅에 내리던 이가 그였지마는, 이루어내지 못한 세계의 구원 클라비스로서 바라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대답이 들려왔다.
“하지만 모두가 바라는 꿈이기도 하잖아요, 세계가 멸망하기 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을 수가 없죠.”
“예, 그렇습니다. 우선은 숲을 빠져나가도록 할까요, 이곳은 시야가 전혀 파악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 클라우스트라는 대답 없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느 방향이 숲을 나가는 쪽인지는 알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군단장이 죽은 이상, 숲의 마법은 해제하기 어렵지 않게 되었을 테니. 그런 클라우스트라의 등을 다른 클라비스들이 따랐다. 클라우스트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의식에는 다행이었겠으나 그의 무의식에는 불행이었을지도 몰랐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클라우스트라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클라비스도 그것을 눈치챈 듯했다. 불안감이 등 뒤를 엄습했다.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냐? 왔던 길 같은데, 여기.”
“…맞아, 똑같은 길이야. 분명 마법은 해제했을 텐데…. 마법이 아니라, 신성력이었나…?”
“마법을 해제한 건 분명해. 신성력이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해제할 수 없었겠지만, 나는 분명히, 뭔가를 풀어냈어.”
“뭔가 다른 것일 가능성도 있지 않아요? 마법과 신성력이 중첩되어 있다거나….”
“신성력이 광명신의 힘이었을 때는 서로 반발하곤 했지만, 암흑신의 힘인 지금은 아무것도 보장할 수가 없겠습니다.”
“어렵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
“한 번만 더 해 볼래요? 뭔가 방향을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 그럴까…. 잠깐만, 내가 마법을 제대로 해제한 게 맞는지 확인해 보고.”
그러나 클라우스트라는 그가 해제한 마법에 실수는 없었으리라고, 단지 제가 했던 추론이 틀렸을 뿐이리라고, 그리 생각했다. 클라비스 중 가장 마력을 다루는 데 능하던 그가 실수 저질렀으리라고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클라우스트라가 그 해제에 실수 없었다 믿은 결정적인 사유는 테네브리스의 일로 짐작할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잊고 있었던 계약, 그것의 이행.
클라우스트라는 그 탓이라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분명 제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 짐작에 확신은 없어 클라비스들이 이끄는 대로 침묵하고만을 있었다.
“어떻습니까?”
“으음, 괜찮았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군. 어떻게 된 거지?”
“뭐, 어쩔 수 없지. 한 번 더 해 보자. 아까 그 방향은 말고.”
“그래, 아까는 분명 환상방황이겠지…, 가자.”
그러나 걷고 걸어도 클라우스트라가 기대하던 바깥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출발지로 돌아오지도 못한 채, 영원과도 같은 숲속을 헤메이고만 있는 듯했다. 점점 확신이 자라났고 이제는 입을 열 때만을 고민하던 차였다.
“뭔가 다른 게 있는 것이 분명해. 우리가 이런 숲속을 한두 번 와 봤다면 환상방황이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출정 이후로 대륙 하나를 다 돌았던 우리가 숲 하나에서 길을 잃다니…. 그리고 무엇보다, 그 정도였으면 처음 여기 와 너를 찾지도 못했을 거야.”
“잠깐만요, 관점을 다르게 보면, 그게 마법이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이를테면, 이곳은 원체 땅의 종족을 거부하는 숲, 그것에 억지로 땅의 종족을 받아들이게끔 했던 것이 마법. 우리는 그것을 해제했기 때문에, 이 숲에서 거부당하고 있는 거죠….”
“요정들의 땅에는 그런 것도 있어? 인간의 관점으로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군. 천룡대륙에서는 그런 숲이 존재한단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어.”
“아니, 이쪽도 없는 건 마찬가지예요. 그냥… 우주 원리가 바뀌었다 하니 제시해 본 가능성이지, 원래의 우주였다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인걸요.”
“그래…? 그렇다면 역시 모르겠어.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생겨 버리잖아. 뭐랄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은, 어렵네.”
“본래 처음이라 하면 어려운 것이 당연지사일 테죠. 저 역시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그 군단장이 이 숲에서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이라면, 군단장이 마력보다는 신성력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마법은 그것을 숨기기 위한 연막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성력이 아니라, 이건, …이것도 신성력인 셈인가?’
클라우스트라는 이것을 테네브리스와의 계약 탓임을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것에도 신성력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두고 나가라는 말뿐이었다.
“있잖아, 너희들, 나를 버려. 나를 버리고, 이대로, 쭉, 앞만을 보고 나아가라. 만일 숲에서 계속 방황하게 된다면 다시 만나 해결책을 모색해야겠지만, 만나기는 어렵지 않겠지. 그리고… 숲을 나설 수 있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 나를 이 숲속에 남겨 둔 채로, 쭉, 나아가서, 이런 멸망한 세계에도 생존자가 있다면, 그들을 도와줘. 그리고 계속 그렇게 살아가. 남들을 도우면서, 이미 멸망해 버린 세계에서도 구원자는 될 수 있으니까, 구원자가 되어 살아줘. 나는 찾지 말고.”
똑같은 의미의 단어들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당부임은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끝없이 되뇌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클라비스가 아니라, 클라우스트라 자기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애들은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아, 그래서는 안 돼, 그래서는 안 돼. 절대로 그래서는 안 돼. 그 애들이 모두 가고 나면, 계약을 이행하고 나면, 그들이 살아가도록 나는 죽자. 그 애들이 나를 구하러 와서는 안 돼. 그런 일은 없는 거야. 그러니까 모든 게 끝난다면 나는 그때 죽자. 이미 진리는 부질없다는 것쯤은 명백하니, 죽는 대로 좋은 거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너를 버린다는 것이 우리에게 대체 무슨 의미가 되지? 왜… 너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함께 갈 수는 없는 거야? 너, 대체 뭘 알고 생각하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작전 명령하듯 너를 버리라 말하는 데는 네가 뭔가 짐작한 바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우리도 좀 알려 줘. 아무런 말도 없이 너를 버리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말할 수는 없어.”
그래, 말할 수는 없었다. 테네브리스와 거래하여 치를 대가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그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주먹 쥔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제발 믿어줘, 그런 생각들만을 계속 했다.
“네가 말할 수 없다면 우리도 너를 버릴 수 없어. 우리가 너를 포기해야 하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해. 대체 너는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를 두고 가 줘, 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 위험한 숲에 전투 능력이라곤 없는 너를 두고 갈 리가 없잖아. 너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게 해결책이 아니라면 어떡할 거냐. 우리가 한 바퀴를 돌아 오는 동안, 네가 멀쩡하게 살아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어? 아까 내가 너를 불렀을 때도 그 순간 탓에 군단장의 공격을 받았잖아. 너를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어.”
“걱정하는 바는 알겠지만, 그럴 일은 없어. 너희가 나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나 같은 걸 걱정할 바에는… 아니야.”
‘배신자 따위를 걱정하느라 소중한 너희들을 낭비하게 할 수는 없어. 걱정할 대상이 따로 있지, 나를 걱정하지는 마.’
모두들 걱정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걱정하지 말아 달라고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클라비스는 항상 누군가를 구원하고자 했고, 그들의 동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클라비스는 그를 돕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구원을 바랄 수 없었다. 도움받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아 주면 안 돼? 정말 나를 걱정한다면, 나를 두고 가, 제발. 나 같은 건 이제 머릿속에서 잊고 떠나 줘.”
‘아, 잘못한 건 누구지? 처음부터 나였고, 이번에도 나잖아. 왜 그런 거야? 내게 무슨 화낼 권리가 있지? 그 애들은, 기껏, 나 같은 녀석을 생각해 준 건데, 싫어, 나 같은 건, 당연히 미워하겠지…. 아니, 미워해야 해. …하, 그럴 용기가 있었더라면 말이나 해 줬어야지. 나는 대체 뭘 두려워하고 무엇으로부터 도망친 거냐? 어차피 이렇게 될 거라면… 역시 그 애들이 살아난 시점에서 죽는 게 맞았는데. 상처나 줘 버렸어. 쓸모없는 녀석.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이나 되다가, 하다못해 걱정해 준 애들에게 화를 내. 뭘 위해 잘 보이고 싶었던 거냐, 나는. …그 애들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면, 웃게 해 줬어야지.’
등을 돌려 도망쳤다. 늘상 그래온 것처럼,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다시 돌아가게 되어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신에게 기도했다.
[암흑이시여, 저를 격리해 주소서.]
‘이제는 하다 하다, 광명을 저버리고, 테네브리스에게 기대기나 하는, 하… 클라비스 실격이다, 정말. 아니, 그때부터 이미 자격은 없었어…. 그래도 들킬 수는 없어. 절대로 말할 수는 없어. 그냥 이대로 죽으면 되는 일이야. 이젠… 그 애들도 내가 죽으면 기뻐해 주겠지.’
“그래, 드디어 나를 찾을 마음이 들었니? 참으로 오래 걸리더구나.”
“암흑…이시여. 미천한 이가 암흑을 뵙습니다.”
테네브리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앉으렴, 하는 기만인지 선의인지 모를 것도 내주었다. 클라우스트라는 체념한 눈빛을 하고 앉았다. 다리를 타고 기어 오던 죄악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세상도 멸망시킨 주제에 친구들과 싸웠다고 침울해진 모습이라니, 정말 어린 애답구나.”
“그…렇습니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클라우스트라는 입안의 독약을 굴렸다. 한 번만 깨물면, 무엇보다 빠르게 죽음을 가져다줄 독약.
‘왜 나는 지금껏 살아 있지?
살아갈 이유, 진리라면 진작에 얻었어. 그 진리가 내 삶을 이 진창에 처박은 것마저 이제는 전부 알았다. 아니, 진리를 얻기 위해 스스로 진창에 몸을 내던진 것마저 이제는 전부 알았어. 정말로 더 바랄 것이 없다, 더 이상은 바랄 자격이 있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죽음을 바랄 자격까지는 있을까, 클라우스트라는 알 수 없었다.
“보여요?”
“안 보입니다. 그렇게 빠른 감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어디로 간 거지?”
“모르겠어요, 이젠 어쩌면 좋죠?”
“우리를 따돌리다니, 그 녀석 체력도 대단치 않을 텐데. 녀석은 또 무슨 수를 쓴 거야? 알 수 없는 소리만 잔뜩 늘어놓고선.”
“우리… 그 애에게 버려진 걸까. 어렵게 찾아냈는데, 두고 가라는 소리만 남기고 사라지다니. 두고 갈 수 있을 리 없잖아….”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말없이 입술을 짓씹었다. 클라비스로서는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자.”
마침내 그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공기는 여전히 무겁고도 무거웠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바는 같았다.
“그래.”
“예, 출발합시다.”
“알겠어요. 어느새 깜깜해졌으니 조심하죠.”
그들은 클라우스트라를 이해하고 있었다. 클라우스트라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해할 단서 하나 없었지만, 그의 심정에 대해서만은 짐작 가는 바 없지도 않았다. 분명 그는, 클라비스가 아는 그라면, 전술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클라비스는 그 방법이 그의 자기희생이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 방법이 효과 없으리라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결국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리라고. …그렇다면, 너 역시 깨달은 자로구나.”
클라우스트라는 긍정의 답도 부정의 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답이 긍정임은 테네브리스 모르지 않았다.
“세계가 이리되기 이전, 『우주 원리에 대한 하나의 통찰』이 있었지. 나는 그 논문을 읽고 이것이 이해한 자의 글이 아니라 깨달은 자의 글이라는 것에 놀랐단다. 어쩌면, 너도 그 글을 읽은 것이겠지.”
클라우스트라는 웃었다. 즐겁지는 않았다. 이제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는 감각이 들었다. 테네브리스가 만약 그 글을 읽었다면, 테네브리스의 사상적 스승은… 바로 제가 아니겠나.
“―암흑이시여, 그 논문의 저자를 알고 계시나이까.”
세상을 멸망시킨 것은 다름 아닌 클라우스트라 자신이었다. 마지막 순간, 구원과 멸망에서 멸망을 택한 것도 그였지만, 멸망으로 이어지는 방아쇠를 가장 먼저 당긴 것도 클라우스트라였던 것이다.
‘그 논문은 출판되어서는 안 되었어. 아니, 그 진리는 발견되어서도 안 되었다. 광명 홀로 아시는 채로, 그렇게… 그렇게 언제까지고 남아 있었어야 할 사실이었어. 내가, 그 논문을 출판하겠다고 생각해서….’
테네브리스는 우주 원리의 유일한 이해자답게, 모든 사실을 이해했다. 처음 거래를 제안했을 때 얻으리라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큰 수확이었다. 각성자를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각성자가 이해자가 될 가능성을 가졌던 각성자라니. 테네브리스는 미소 지었다.
“너 같은 어린아이도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었다니, 지금껏 모르고 있었구나.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였기에 깨달을 수 있었을까…. 자, 소원이 있다면 말해 보렴. 계약에 약속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 이건 기쁨에서 우러나온 호의, 라고 말해 볼까.”
‘믿을 수 없다. 믿어야 할까? 기적과도 같이 주어진 두 번째 소원을, 첫 번째 소원과 같이 신뢰해도 좋을까. 애당초 내게 그만큼 소망하는 일이 또 있던가? 그 애들을… 그래, 내 결정으로 죽게 된 그 애들을 다시 살리는 일만큼.’
그렇지만 그에게는 감히 바랄 수 없는 소원이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되돌려, 세계를 멸망하기 전으로 되돌려, 진리를 선택하지 않는 소원. 그러나 그것은 감히 테네브리스에게 바랄 수 없는 것이자 자신이 바라고 있다고도 인정할 수 없는 소원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아이야. 의심하지 않아도 좋단다―. 바라는 것을 말해 보렴.”
“저는… 정말로… 친구들이 다시 살아났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시간을 되돌려 주세요, 진리 따위 깨닫지 못했던 때로 돌려보내 주세요…. 아무것도 잘못된 선택이라고는 하지 않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테네브리스는 클라우스트라 자신조차 인정하지 않은, 그렇기에 입 밖에 내지 못한 말들에 웃음지었다. 제 발 아래에서 떨고 있는 클라우스트라가, 한때 자신을 위협할 정도였던 클라비스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세계 전체의 시간도 되감아 줄 수 있단다, 나의 신도야.”
“…암흑께서는 어찌하여….”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내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이미 네게서 충분하고도 넘치는 것을 얻었어.”
‘가능하기만, 가능하기만 하다면….’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됨을 클라우스트라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쉬이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그 시절의 그라면 또다시 같은 선택을 반복할 테니. 테네브리스는 단순히 시간을 되돌리는 것으로는 클라우스트라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그 애들이 무얼 하려 하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십시오… 부디.”
“아하하, 끝까지 너를 위한 소원은 빌지 않는구나―. 그대로 괜찮은 거니?”
“제겐…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입안이 썼다. 이제는 눈앞의 세계 멸망자― 테네브리스보다도 자기 자신이 더 미웠다. 모든 것은 그날의 선택만이 아니라 진리를 구하고자 했던 시간들에 의해서 망가졌다…. 무의식중에 주먹을 꽉 쥐었는지 손바닥이 따가웠다. 배어 나오는 피를 아무렇게나 옷에 문질러 닦았다. 죽음으로라면 속죄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럴 수 없대도 스스로를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세계의 반역자를 처단한다면, 자신의 죄는 조금 덜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래, 그러도록 하지.”
테네브리스는 클라우스트라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사라졌다. 클라우스트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클라우스트라는 테네브리스가 사라진 자리에 영영 있을 것처럼 앉아 있었다. 쓰다듬어진 머리칼이 비참했다. 입안의 독약을 깨물지 않고 굴렸다. 모두에게 사과는 해야겠지, 그런 생각을 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은 이대로 발견되지 못한 채 죽어갔으면 바랐다. 친구들을 다시 보고 싶었으나 볼 자신이 없었다. 사과를 꺼낼 자신도, 그렇다고 없던 일인 셈 넘어갈 자신도 없었다. 결국 처음부터 그랬듯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멍청이일 뿐이었다.
‘배신자 주제에, 진실을 털어놓을 용기도 없어서…. 친구를 배신할 용기는 있고 마땅히 받아야 할 미움을 받을 용기는 없는가!’
결국 그는 날개를 펼쳤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날아오를 수는 있었다.
'이대로 높이높이 날자, 더 이상은 나를 지탱할 수 없을 때까지 높은 곳으로….‘
그러나 그는 하늘의 종족이었다. 더는 땅의 종족이 아니었고 그런 그에게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높이란 없었다. 클라우스트라의 몸은 암흑신을 제외한 그 누구보다 자유로웠으나 그 사실은 그의 마음을 더더욱 강하게 옭아매었다. 그는 어디로 날아가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로 한참을 날고, 또 날았다.
“아아, 너희들…, 보고 싶어….”
지친 클라우스트라는 절벽의 끄트머리에 살며시 걸터앉았다. 떨어질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날아 오르면 그만일 뿐인 절벽이었다.
‘하지만 너희를 다시 볼 자격은 없겠지…. 아니, 보고 싶다고 생각할 자격조차도 없겠지.’
클라우스트라는 일어나서 걸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관계없었다. 어디로 가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참을 걸어도 다리만 아파 올 뿐이었다. 아픈 다리는 자신이 몸속에 갇혀 있다는 감각을 더욱 강화하기만 했다. 날아서도, 걸어서도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진실만 심장을 찔렀다.
‘행복해지고 싶어, 언젠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같다. 아마 그래서 진리를 그렇게나 구했을 거다. 그렇지만 진리를 손에 넣은 지금은, 내게 무엇이 남았지? 내 손으로 멸망시킨 세계, 내게 배신당한 나의 친구들, …내가 죽인, 내게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던 이들. 내게는….’
얼마나 걸음을 재촉했을까, 희미하게 밝아 오는 여명 아래로 희미하게 숲의 끝자락이 보여 왔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다. 기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숲의 끝에 도달한 것이 친구의 자기희생 덕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드디어… 탈출했네요.”
“정말로 그 녀석이 없으니까, 한 번도 맴돌지 않았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피곤하네, 밤새 걸은 모양이야…. 그렇지 않아? 우리, 좀 쉬자.”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마치 마지막까지 이유를 말하기를 꺼리던 클라우스트라의 얼굴과 겹쳐 보여, 그러자고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나를 찾지 마.”
왜? 어떻게? 우린 친구잖아. 어떻게 우리가 너를 버리고 그대로 떠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우리들, 친구잖아…. 대체, 대체 뭐가, 우리가 너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거야. 남들을 위해 살라고 말하면서, 왜 너를 위해서 사는 건 안 된다는 거야….’
결국 그들은 생각을 멈추지 못하고, 숲을 나와 동이 트는 시점에서야 편히 쉴 수 있었다. 혹시나 클라우스트라가 살아 돌아올까 한 명씩 돌아가며 보초를 서는 것만 제외하면. 그래,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클라우스트라 홀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 나갔음에도, 그러니 절대 마주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다시 기적처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잠시간 다시 함께한 것 역시 그런 기적과도 같은 만남이 아니었던가. 한 번이 있다면 또다시 두 번은 없을까….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그래, 그럴 거야. 그때는 꼭, 어떻게 한 건지도 물어보자.”
“그러지 않으면 속이 안 시원하겠어. 어떻게 나보다 빨리 달린 거람.”
모두들 쓰게 웃었다. 짐작한 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본래 클라우스트라는 마력도 기력도 신성력도 다루지 못했지만, 신성력이 개편된 이 세계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면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신성력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신성력은 그들의 신인 광명의 것이 아닌, 암흑신의 것. 그들은 그들과 함께 세상을 구하던 동료가 세상을 멸망시키고 주인이 된 암흑신의 신자가 되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생존자들이 있을 법한 곳으로 향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이야. 대기 중 에테르 흐름을 볼까? 좌표를 모르니까 주변의 생존자들을 전부 탐색할 수는 없지만, 마력을 다루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 정도는 찾을 수 있을 텐데.”
“…마력을 쓰는 존재가 테네브리스나 그 부하는 아니겠지?”
“음, 그걸 모르는구나. 확실히 그렇네. 방금 내가 본 바로는 저편 산 중턱의 에테르 흐름이 인위적인데, 생존자라는 보장이 없다는 걸 깜빡했어. 어떡할까?”
“글쎄요, 그렇지만 생존자를 찾을 다른 방도가 있는 건 아니니…. 일단 가 보고, 테네브리스 측 잔당이라면 해치워 버려요!”
“전투 상황이 발생하면 그 분이 안 계시니만큼 조금 힘들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 보고 싶습니다.”
“그런 약한 말은 하지 않아, 그 녀석 없이도 싸워야 한다면 이긴다! 가 보자고.”
“뭐, 그렇다면야. 가자.”
그들은 해가 지고서야 예의 그 산 중턱에 올라설 수 있었다. 출발부터 한낮이었던 것이 큰 문제였으나, 산 자체는 그리 멀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 와중 다행스럽게도 마력의 흔적은, 마력으로 불을 밝히고 지내는 소수의 생존자들이었다. 생존자 캠프의 시설은 파괴되고 열악해 보였으나 마법으로 일단의 보수는 해 둔 듯 추가적인 붕괴의 조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한 엘프 노인이 클라비스들을 발견한 듯 물었다.
“거기, 누구 있는가?”
“예, 안녕하십니까. 지나가던 여행자들입니다.”
과연 이 인사가 맞을까? 멸망해 버린 세계에서도 지나가는 여행자가 있을까? 클라비스들은 알 수 없었지만 다르게 소개할 방도도 별로 없었다. 이 이상 정체를 물어 오거나 하지는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가, 반갑네. 그렇지만 이곳은 워낙 소규모라 더 이상의 인원을 수용하기는 어렵다네. 우선 오늘 밤은 이곳에서 묵더라도, 추후 다른 캠프를 찾아보라고 말해 주고 싶네.”
“아, 저희는… 별도로 지원이 필요해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런가? 다행이로구만. 정말 유감이지만, 이곳도 사정이 넉넉지 않아서 말일세.”
“물자 문제라면, 저희가 도와드릴까요?”
“그럴 수가 있나? 도와준다면야 고맙겠어. 그렇다면 오늘은 우선 쉬고, 내일 이야기해 보세.”
클라비스들은 노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이 우선 묵을 자리를 보아 오겠다고 떠나자, 그들은 생각하고 있던 말들을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저희가 도울 것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러게, 그리고 생존자 캠프라니… 꽤 살아 남은 걸까. 여기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있다는 듯이 말하던데.”
“그리고 나는 에테르의 왜곡이 이 불 때문에 발생했다는 게 감동적이야…. 저 분은 멸망 이전부터 여기에 계속 지내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 있으려나 하는 기대가 들어.”
그날 밤은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전날보다 훨씬 편안한 잠자리임은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홀로 광대한 숲속에 남은 친구를 생각하면… 지쳐 기절하다시피 하기 전까지는 잠에 들 수 없는 것이었다.
“최근, 여기로 갈 곳 없는 이들이 몰리는 바람에, 짓고 있던 농사만으로는 식량을 충당하기 어려워졌다네. 산짐승을 잡거나 산나물을 캐면 해결될지 모르지만, 워낙 마수들이 강해서야…. 어찌하기가 어렵더군.”
“그런 거라면 저희 힘으로 충분해요, 맡겨 두세요.”
반년 넘게 식재료라면 현지 조달이다, 그런 상태로 지내 온 클라비스였다. 하다못해 들판에 먹을거리가 없을 때는 산으로 들어가던 클라비스가, 산에서 식재료를 조달하지 못해 끙끙댈 리 없었다.
“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가 발걸음 닿는 대로 여행을 하다 보니… 이곳이 좌표상으로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노인도 좌표를 묻는 이가 그간 없었는지 반가운 기색이었다. 그러나 좌표를 들은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기억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면, 그들이 있어야만 하는 곳은 천옥 대륙. 하지만 좌표가 가리키는 곳은 천공섬이었다.
천공섬, 다른 이름으로는 니힐. 섬과 대륙의 경계가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 네 대륙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모든 계절과 시간의 기준이 되는 곳. 유일하게 자치단체 외의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곳. 땅의 종족에게는 가장 낯선 땅이자, 하늘의 종족이 유일하게 지상에 발을 딛는 땅. 광명이 가장 밝게 비추는 곳. 그들은 그 천공섬에 와 있었다.
“혹시, 지금 날짜와 시간이….”
이로써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필요한 좌푯값은 모두 얻은 셈이었다. 간단한 준비를 마친 뒤 길을 나섰다.
“마수는 피해도 피해지만, 먹을 수 없다는 게 가장 손해 같네요.”
“그런가? 마석이 들었으니 이득 아니야?”
“뭐, 평상시라면 이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마석보다는 식량이 필요한 입장이니까요.”
“그건 그렇네. 그래도 마석이 충분하면 돌아갈 때 걸어가지 않아도 되는걸. 이동 마법으로 해결할 수가 있어.”
“그건 꽤나 솔깃한데요?”
돌아보는 찰나 마수가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유테니아가 마수의 심장을 갈랐다. 거의 동시에 레이피어가 마수의 어깻죽지를 베었다.
“헉, 헉…. 방금, 위험했어.”
“이런, 죄송해요….”
“아니,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야. …초입인데도 마수가 나오다니, 생각보다 이쪽 길은 위험한 모양이군.”
“무턱대고 오러로 쫓아내려 들면 짐승도 도망갈 것 같은데. 곤란하단 말이지.”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가는 것으로 하죠. 오러를 내보이는 것은 마수를 여럿 마주쳤을 때로 한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두 그 의견에 동의했다. 마수 한둘 처치하는 것쯤은 조금씩 체력을 소모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가능했다. 어려움은 오히려 예상보다 산짐승이 적은 것에서 나타났다. 마수의 탓인지, 일반적인 산에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산짐승들만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산나물이 풍부한 것도 아닌지라, 예상보다 배는 가까이 많은 시간을 사냥에 투자해야 했다. 다행히도 사냥에 투자한 시간과 자원은 헛소모가 아니었는지 성공적으로 끝났다.
“사냥이란 언제 해도 힘드네요. 캠프에서는 당당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저 혼자였으면 절대로 못 했을 거예요.”
“그러냐? 나는 라비린토스 패거리들과 싸우느니 사냥이 차라리 마음 편하다마는.”
“뭐, 그야 그렇죠. 라비린토스는 전략 없이 상대할 만큼 만만하지 않으니까요.”
그 말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클라비스의 전략 담당이 전략적으로 희생한 결과가 지금이었다. 무슨 말을 더해도 위안 삼지 못할 것임은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자, 이동 마법을 쓸 테니 모두 모여.”
“예.”
식량을 조달하니 캠프의 모두에게 환영받을 수 있었다. 살짝이었지만 경계하는 듯하던 이전의 태도와는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환영받는다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도 환영받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은 듯했다.
‘광명이시여,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부디 답을 주십시오…. 제가 그 분을 위해서 무엇을 하여야 좋겠습니까….’
결국 전날과 다름없는 수준의 수면이었다. 그런 자책의 날들이 빠르게 흘러 이윽고 나흘 가까이 지났다.
“그동안 지낼 곳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이만 다른 곳으로 떠나 보려 합니다.”
노인도 처음과 달리 이제는 아쉬운 기색이었다.
“더 머물지 않고, 벌써 떠나는가?”
“예, 다른 캠프로도 향해 보려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산을 내려왔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글쎄, 해안가는 어때? 그쪽에는 아무도 없으려나?”
“아냐, 딱 좋을 것 같아. 해안선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기에도 적당해 보이네. 식량 확보만 조금 걱정이려나… 그동안은 줄곧 내륙에서 수렵으로 충당했으니까.”
이동할 곳을 정하니, 시야 내에서는 좌표를 계산해 이동 마법을 쓰는 방식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계산을 실수할 경우 크게 다칠 수 있다는 위험과 체력 대비 마력 소모가 크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신속성과 편리성 탓에 세부적인 탐사가 필요하지 않은 현재 상황에는 적합했다.
“아아― 이쯤에서는 걸어서 탐색해 보는 걸로 할까?”
“그럴까요? 마침 덕분에 체력도 남았고, 해안가니까…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도 좋을 것 같네요.”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서 땅의 종족으로 보이는 형체가 시야 끝에 들어왔다. 아주 익숙한 모습에, 순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보셨습니까?”
“미안, 뭐를? 전혀 못 봤어.”
“정면에서 플러스 4분의 π 방향으로, 약 1,000미터 거리에….”
모두 일제히 그 방면을 돌아다보았다.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존재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라비린토스 녀석일까?”
“그럴지도요. 조심히 다가가 봐요.”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인식하지 못하게끔 마법으로 상대의 시야를 왜곡했다. 상대는 마법에 걸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가만히만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가장 앞서 걸어가던 이가 순간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에요?”
“…저, 모습, 그 애 아니야?”
그 말은 하나의 방아쇠가 되었다. 그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클라우스트라가 있었다. 그들은 클라우스트라를 끌어안았다.
“너희들? 나, 나는….”
…너희들 곁에 있을 자격 따윈 없어, 그런 말은 끝내 뱉지 못했다. 그것은 곁에 있고 싶었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됨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클라우스트라 자신을 찾아 준 것이 너무나도 기뻐서, 단지 그런 감정들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냐, 얼마나 걱정했는데.”
“맞아요! 찾지 말아달라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묻고 싶었던 것들은 어느새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고작 그런 것들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어졌다. 클라비스가 있고, 그가 있었다.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미래를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클라우스트라는 그렇지 않았지만.
“자, 이제 정말 네 말대로 생존자를 찾아보자. 이미 멸망한 세상에서도, 누군가 구할 수 있다면… 너도 누군가를 구하는 쪽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려서, 이 애들과 다시 만난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좋을 텐데. …아니, 그래서는 안 돼. 내 잘못에서 도망치려고 해서는 안 돼….’
가까스로 웃으며 자신을 끌어안은 이들로부터 몸을 빼냈다.
그래, 또 누군가를 구하러 가자.”
함께 발을 맞추어 걸음을 내딛었다. 발끝에 눌러붙은 죄책감과 자기혐오 따위를 무시하려 애쓰며.
“저쪽에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요? 생존자 캠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흐려지는 말끝에도 개의치 않고 클라비스는 일제히 그의 손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렴풋이 무엇인가 시야에 들어왔다. 공간 이동보다는 물리적 접근이 안전하리라는 판단 하에, 그들은 숨을 죽이고 발소리도 죽인 채 그곳으로 향했다.
‘에테르 흐름이 심상치 않아…. 무언가의 마법이 걸려 있는 듯하군. 파훼하자.’
―폐허,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던 것이 고도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고층탑의 모습을 나타냈다. 건축 양식과 사용된 기술력을 보아 결코 오래된 건축물은 아니었다. 생존자들의 캠프로는 예상하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아… 소리를 죽인 것은 무용했나. 다가올 때부터 센서나 카메라 따위로 감시하고 있었겠어.’
‘적들의 기지일 가능성이 있겠어요. 그렇지만 다가가는 동안에는 어떤 공격도 없었네요…. 전투보다는 그저 지나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몰라요.’
‘마법이 파훼된 것쯤은 이미 눈치챘겠군…. 그렇다면 다음은 정면 돌파? 아니면 회피? 어느 쪽이냐, 나는 상관 없다만!’
‘여기는 천공섬이지만 엘프들이 살던 지역인 듯합니다. 기술력이 엘프 외의 다른 종족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수준이군요. 그중에서도 꽤나 최신의 것… 멸망 전 자치회에서 사용하던 건물일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마법이 걸려 있었던 이유는 은폐, 은폐하고자 했던 이유는 보안?’
이런저런 생각과 눈빛들이 오갔다. 클라우스트라는 입구를 알 수 없는 탑을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클라우스트라를 보호하는 형태로 두 발짝 내디뎠다.
“아니, 너희들….”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대신 조금 더 나아갔을 뿐이었다. 탑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클라비스 중 누군가에게 들었던 마탑이 이런 건물이었을까, 라는 실없는 생각을 잠시 했다.
“계십니까.”
“들렸을까?”
“아마도.”
대답은 한동안 없었다. 그러나 소리 없이 문이 나타나 있었고, 클라비스는 문 안으로 향했다. 건물의 구조는 기묘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를 향하는 나선 계단이 한참을 이어졌고, 방과 연결되는 문은 계단의 꼭대기에 단 하나 있었다.
“어라, 중앙에 승강기가 설치된 형태일 줄 알았는데. 외관만 봐서는 엘프들의 고층건물인 것 같더니 내부는 전혀 다르잖아? 이건 마탑식도 아니고, 신기하네….”
“얼마나 높이 올라온 걸까요? 나선형이라 계산해 보지 않고서는 한 층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바깥에서 짐작했던 높이를 생각해 보면… 탑 전체 높이의 10분의 9 정도 올라온 것 같습니다.”
“굉장히 비효율적이네. 전체 높이의 10분의 1만 방으로 쓴다고? 원뿔형으로 좁아지는 형태의 건물을? 중심부에는 뭐가 있는 걸까….”
“글쎄요, 일단 들어가 보는 게 어때요?”
클라우스트라가 문을 두드리고는 잠시 후 문을 열었다. 각종 화면이 탑의 바깥 이곳저곳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비행정이나 선박들의 관제탑 같은 모양새였다.
“이 정도의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다니… 공격 장비는 보이지 않지만 군사 시설인가? 그렇다면 라비린토스 측에서 사용하던 건물일 가능성도 있겠군.”
안으로 진입한 클라비스는 처음 존재하리라고 예측했던 승강기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위부터는 승강기인가.”
“대체 아래쪽은 왜 계단이었던 걸까요? 이대로라면 계단 부분은 중심이 비어 있는 구조일 텐데.”
클라우스트라는 재빠르게 승강기의 모습을 훑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작동을 시작하게 하거나 멈추게 하는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음성 인식인가 싶어 말을 하려 다가간 순간, 움직임을 인식해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그러나 승강기는 예측처럼 위로 올라가는 대신, 한참을 아래로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이 정도면 올라갔던 것보다도 더 내려가는 것 같은데, 지하로 가는 건가?
“정말 말도 안 되게 이상한 구조네. 엘프들의 건물은 다 이 모양이냐?
이것저것 던진 질문은 승강기의 문이 열리면서 끝났다. 승강기의 문이 열리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며 클라비스를 살짝 떨게 했다.
“이런, 보온 마법 좀 걸게. 그리고 너무 어두운 것 같다. 조금 밝게 해 볼게.
눈이 적당한 어둠에 익숙해지자 내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밖에서 보았던 탑의 넓이보다 훨씬 넓은 지하 공간은, 거대한 수조와 배양기로 보이는 기계장치가 가득했다.
“이건… 대체 뭐지?”
“…실험실?”
“라비린토스 측이 쓰던 걸까요? 아니면 그들이 파괴하지 못한 걸까요?”
“그보다, 아무도 없는 건가…. 처음에 문이 열렸기에 적이든 생존자든 누군가는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기계가 음성을 그저 인식해서 문을 여는 행위를 수행한 것 같습니다. 보통 보안 탓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 기술이지만, 이곳은 마법으로 그 보안을 대신하고 있었던 것 같으니….”
“흐음, 위쪽으로 다시 올라가자. 별다른 것도 없는 것 같아.”
승강기의 문은 닫힌 채였지만, 가까이 다가가는 것으로 열렸다. 모두 승강기에 올라타자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여기 있던 이들은 마법은 쓰지 않았던 거겠지? 마법을 쓸 수 있으면 그냥 공간 이동으로 움직이면 되니 이런 승강기를 설치할 이유가 없잖아.”
“글쎄… 마력을 아끼려는 의도로 설치했는지도 모르지. 원래는 이곳 전체를 마법으로 위장해 두고 있었으니 가용 에테르가 충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어.”
승강기의 문이 다시 열렸다.
“위로는 어떻게 올라가는 거지? 정말 10분의 9 정도 올라왔다면… 이 천장 높이로는 반드시 위에 공간이 남을 텐데.”
클라우스트라는 조금 전 문이 생겼던 경험을 떠올렸다. 그런 장치가 내부에도 있는 걸까? 가만히 서서 보는 것만으로는 아무리 꼼꼼하게 관찰해도 찾을 수 없었다. 클라비스도 여러 방향으로 움직여도 보고, 소리도 내 보고, 벽에 손을 대 보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대기 중의 에테르 흐름에도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나.”
“괜히 저 때문에 시간만 낭비했네요, 미안해요.”
“아니야, 신경쓰지 마. 결국 내 호기심이 강했을 뿐이야.”
그래, 항상 클라우스트라의 호기심은 모든 것을 망쳐 왔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고개를 내저어 생각을 내쫓았다. 클라비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괜찮으냐 물어왔지만 답할 수 없었다.
“…내려가자. 공간 이동, 부탁할게.”
클라비스, 클라비스, 클라우스트라. 입안에서만 맴도는 이름은 썩 좋은 기분을 주지 못했다. 대신 친구들의 이름을 되뇌어 보자, 기분 좋은 안정감과 동시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이름 부르기 놀이 따위는 그만하기로 했다.
시선을 발밑에서 친구들로 옮기니, 즐겁게 자기들끼리 놀고 있는 모습이었다. 문득 그는,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이 좋은 일이었는지 알 수 없어졌다. 세계를 지키고자 했던 것도, 마침내는 세계를 멸망시킨 것도, 클라비스를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도, 클라비스에게 친구가 되었던 것도. 어쩌면, 차라리,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겠다, 그런 감상들. 마치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즐거워하는 제 친구들을 보고 있노라니 아무것도 알 수 없어지는 것이었다. 분명 몇 번이고 다진 결심은 항상 친구들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듯이 무너져 내렸다. 이것도 모래 위의 성일까? 클라우스트라는 결국 그 질문에마저 답할 수 없었다. 기분이 조금 찝찝해진 그에게 답 없는 질문 대신, 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 이는 그의 친우들, 클라비스였다. 그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분명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리라 생각해, 조금 민망해졌다.
“야, 그래서… 아니, 그게 뭐야. 말이 안 되잖아. 너희들, 다 됐고 기다려 봐. 네가 대답해 줘. 빨대에 구멍은 한 개냐, 아님 두 개냐?”
“…뭐? 당연히 두 개잖아, 아니… 하나인가? 어라? 하나, 둘….”
“뭐야, 너도 몰라? 이런… 너만은 내 편일 줄 알았건만. 아니, 같이 모른다고 하면 내 편이겠지!”
“이리되면 처음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빨대는 구멍이 막혀 있다면 원기둥형으로 생긴 물체이므로, 절단면인 원이 두 곳에 생기지 않습니까. 구멍은 두 개입니다. 여기에 무엇이 모순된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렇지만요… 위상수학적으로 빨대와 도넛이 같다는 이야기도 못 들어 보셨어요? 도넛에는 특정한 절단면이라고 할 게 없죠, 구멍과의 연결부분마저 둥그니까. 우리는 도넛의 구멍이 하나임에 모두 동의하는데, 어째서 빨대는 두 개의 구멍을 가진 게 되는 거예요?”
“사실 빨대에 구멍은 네 개라고 하면 믿을래? 구멍의 정의 자체는 뚫어지거나 파낸 자리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 그런 언어학적 정의에 대한 구멍을 상정하진 않으니 생략할게. 빨대는 얇지만, 두께가 있잖아. 빨대는 회전체로 판단할 수 있겠지, 그럼 회전축과 떨어진 직사각형의 회전체로 생각해야 해. 모서리는 안쪽 모서리와 바깥쪽 모서리가 있는 거야, 그것도 위와 아래에. 그러니 절단면, 이라고 했지? 그 원은 네 개지.”
“아… 역시 나는 잘 모르겠어. 나는 빼고 말해줘. 대체 어쩌다 그런 대화로 넘어간 거야?”
“너, 안 듣고 있었냐? 그러게 집중했어야지, 원래 이런 건 말해주는 거 아니야! 네가 잘 들었어야지….”
뒤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아마 웃느라 발음이 무너진 듯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짝에도 무용한,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듯한 문제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을 보라면 늘 웃겼다. 그들은 원래부터 그랬다. 분명 진중한 상황에서는 그럴 줄도 아는 이들이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때면 저런 실없는 농담에 과하게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농담을 못 따라가는 친구를 타박하는 것도 일상이고 하나의 재밋거리였다. 항상 타박받는 입장이던 클라우스트라도 마냥 좋았다. 그도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마찬가지로 웃느라 제대로 된 발음을 내뱉을 수 없었다.
“아, 빨대의 바깥쪽을 구멍이라고 보는 게 어디 있냐. 그렇게 되면 빨대 자체가 환경의 구멍인 셈이잖아. 그럼 이건 구멍을 하나라고 보는 건가? 아니, 이건 항상 내가 말할 때도 헷갈린다니까…. 몰라, 나도 쟤랑 같이 모르는 걸로 할래. 난 이런 생각은 머리 아프다고.”
“그래도 재밌으니까 하고 있는 거 아냐?”
“당연하지, 재미없었으면 이런 걸 생각했겠어? 머리 아픈데 생각할 시도조차 안 했지.”
“생각이라는 걸 평소에도 좀 해 보는 게 어때요?”
“아니, 나 그 정도는 아냐!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나 그래도 꽤 괜찮은 학교 다녔다고. 아니, 너희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했습니다.”
“아, 진짜. 믿었던 너마저? 너무해, 내 편은 없구나… 나는 빨대랑 놀 거야. 너희들은 너희들끼리 놀아.”
“그러니까, 어쩌다 그런 헛짓거리를 하고 있던 거야?”
“헛짓거리라니, 어떻게 그렇게 말하시는 겁니까.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한 헛소리라고요? 헛소리와 헛짓거리는 다른 법입니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괜찮은 게 되는 거야? 나는 잘 모르겠네.”
“그건 역시 집중을 안 해서인 거죠?”
“어라, 그렇게 되는 거? 너무하네. 새로운 먹잇감을 찾은 것처럼 대하지 말아 줘.”
“그러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없지. 저건 헛짓거리와 헛소리도 구별 못 하는 헛-녀석이나 하는 말이야. 자, 거기 헛-녀석, 너는 새로운 먹잇감이 맞다고.”
“너마저! 내가 구해 준 셈이잖아? 이런 건 싫어, 너무하잖아.”
“그렇게 생각 안 하면서 그렇게 말한다고 그렇게 되는 겁니까?”
“물론 아니지. 그러니까, 마음껏 놀려도 된다는 뜻!”
“뭐야, 진짜 너무해! 아까처럼 나 빼고 놀아, 괜히 끼어들었어.”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트라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히 있었다. 세상은 마치, 멸망한 적도 없는 것만 같았다.
“생존자 캠프가 그때 바로 있었던 건 엄청난 행운이었나 봐요. 이렇게 돌아다녀도 털끝만큼도 안 보이네요….”
“맞아, 이상한 탑이나 버려진 시설들은 이렇게나 많은데. 해안선 근처로 돌아다닌 탓인가? 우리가 특별히 생존자 캠프가 없는 곳만을 골라 다니고 있는지도 몰라.”
“생존자라면… 확실히 해수보다는 담수가 있는 위치를 선호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장비와 간단한 정화만으로 식수화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바다와 강이 연결된 곳을 찾아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좋을 것 같은데.”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좌표상으로 여기니까, 근처에 강이 있으려나….”
“해안선을 따라 더 올라가 보죠. 위쪽에 강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역시 똑똑해, 세기의 천재, 따위의 말들을 그는 가볍게 흘려들었다. 세기의 천재라는 단어가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은 이제 받아들였지만, 결국… 결국에는 세계를 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세계의 천재이든 아니든 그런 건 그만한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구의 정확한 좌표를 모르니 공간 이동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저 걷고 또 걷는 것 밖에는 길이 없었다. 밤에는 야영을 하고, 낮에는 걷는 생활을 꼬박 사흘쯤 반복하자 하구에 도착했다.
“와, 드디어 강이야. 이제… 안쪽으로 들어갈까.”
“아, 다행이에요…. 솔직히 천공섬 지리를 자세히 공부한 적은 없어서 걱정했는데. 사실은 천공섬으로 올 때 지도를 봤던 게 다예요.”
“이제부터는 따로 식수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편리하네. 바로 정수해서 마실 수 있잖아. 어쩌면, 민물이 필요했던 건 생존자뿐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마찬가지였을지도….”
강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바닷가에 비해 식물이 많았지만, 그 식물들 중 살아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클라비스는 그것이 전쟁 기지화로 인한 환경 악화 때문인지, 아니면 세계의 멸망과 함께 식물들도 명을 달리한 것인지 궁금했다.
“어떻게 된 게 강에 물고기 한 마리도 없네. 진짜로 멸망한 세계인 것 같잖아.”
“뭐, 너무 흐린 물에는 살지 않는지도 모르지. 어딘가에는 있을 거야, …대신 마수도 함께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두 강이 합류하는 지점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땅의 종족처럼 보이는 형체도 함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신중하게 공간 이동을, 하나, 둘. 가까이서 보니 그는 어린 아이였다. 혼자서 살아가리라고 믿겨지지는 않는, 어딘가에 보호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그 정도 나이의 아이. 조금 더 다가가자 아이 쪽에서 말을 걸어 왔다.
“와, 누구세요? 여기서 다른 누군가를 보는 건 엄청 오랜만인 것 같은데….”
“음, 지나가던 여행자, 랄까….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거니? 보호자는?”
“저―쪽에 저희 마을이 있어요. 따라오세요!”
말을 마치지도 않고 아이는 달려나갔다. 꽤나 체력이 좋은 편인지, 에너지가 넘치는 것뿐인지 클라우스트라는 따라가기가 조금 버겁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클라비스는 그런 클라우스트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여기에요, 저희 마을.”
마을이라고 말했지만 고작 몇 가구뿐, 위치도 인구도 시골 중의 시골이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적은 인원수로 계속 살아왔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이는 어떤 집으로 달려가 마을을 이끄는 이를 데려왔다.
“그대들은… 라비린토스인가?”
당당하게 말했지만 얼핏 두려움이 엿보였다. 라비린토스의 이름을 알고, 라비린토스를 두려워한다. 테네브리스가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고 멸망시킨 것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요, 저희는 클라비스입니다.”
그리 답하면서 순간 두려움이 일었다. 세계를 구하지 못한 우리들이, 세계를 구하고자 했던 이름을 계속 더럽혀도 될까? 숨기기보다는 당당해지고 싶었지만 동시에 머뭇거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반응은 상냥했다. 공터에 야영을 허락받은 것은 물론, 마을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본래는 평범하게 천공섬의 도시에 살았다. 전쟁이 시작되고, 라비린토스가 천공섬을 기지로 삼자, 대륙으로 피난하지 못해 섬의 오지에 숨어들었지.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을 이어나가며 라비린토스의 눈으로부터 피해 있었지만, 어느 순간 나타난 마수에 의해 생계가 어려워졌어. 천공섬에서 마수는
그전까지 한 번도 나온 적 없었는데… 요즘은 빈번하게 나타나더군. 그대들이 라비린토스였더라도 마수들을 해치울 수 있다면 그대들을 이용했을 거야.”
“그것 역시 저희의 탓입니다. 저희가 테네브리스를 막지 못했기에― 우주 원리가 변하고 말아, 천공섬에도 마수가 서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아니, 그대들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테네브리스를 막지 못한 건 땅의 종족 전체의 책임이고 그렇기에 땅의 종족 전체가 변한 우주 원리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겠지….”
“땅의 종족이 책임져야 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오로지 테네브리스의 독단과, 그걸 막을 힘이 없던 우리들… 광명께서는 어째서 저희에게 테네브리스를 막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신 걸까요.”
“…어쩌면 책임은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르지. 책임이 있건 없건 살아가고 싶다는,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까.”
“마수는 우리들이 해결하지. 할 수 있잖냐?”
“뭐, 네가 하겠다면 우리가 반대하지는 않아. 결국 오러를 쓰는 것도 너잖아?”
그리고 닷새가 지났다. 다시 길을 떠나는 클라비스를 따라오는 이가 있었다. 첫날 만났던 아이였다.
“저는요, 어른이 되지 못할 운명이래요.”
운명. 한때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그러나 지금은 세계를 지배하는 우주 원리이다. 클라우스트라는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참을 수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인가. 결국 우주 원리의 전복을 막지 못한 것은 자신이고, 우주 원리의 전복을 도운 것도 자신인데. 클라우스트라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너무 슬퍼서, 슬퍼서, 계속 울었어요. 광명께 빌고 또 빌었어요. 그렇지만,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저는 어른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아직은 살아 있어요.”
“―운명 따위는, 믿지 않아도….”
여전히 믿지 않아도 좋을까, 여전히 비합리적인 결과론자들의 헛소리로 치부해도 좋을까, 클라우스트라를 제외한 클라비스는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클라우스트라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어두운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광명이시여, 광명이시여….’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요? 그건 기쁜 일일까요?”
“어른이 된다는 것…. 글쎄, 우리들도 잘 모르겠네. 하지만, 어른이 될 수 없더라도… 어린 채로 기쁘게, 그렇게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클라비스라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시당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어린아이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과거의 어떤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꼭 어린아이가 되고 싶다는 소망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때의 추억에 영영 머무르기를… 바라는 것이었으니까.
“어른이 되더라도, 어른이 되지 않더라도… 꼭, 행복하게 지내 줘.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운명에도… 행복을 바랄 수는 있잖아.”
클라우스트라는 힘겹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이는 마주 웃어 보였지만 클라우스트라에게는 슬프게만 보였다.
‘세계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런 운명 따위는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었는데.’
“안녕, 잘 가요.”
행복하기로 약속, 하며 멀어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클라비스들은 무거운 마음을 어찌 갈무리해야 좋을지 고민하며 길을 떠났다.
“덕분에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부디 행복하시기를.”
처음부터 클라우스트라는 거짓을 고하는 이였다. 진실을 씹어 뱃속에 숨기고 거짓을 둘러 진실인 양 행동하는 거짓말쟁이. 진실을 제대로 숨길 재주도 배짱도 없으면서, 쌓아온 신뢰를 무기로 어설피 두른 거짓을 믿어 주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자. 무기로 쓴 신뢰에는 자기가 찔려 다친 주제에 그 상처로 동정을 사는 이. 거짓을 고하기도 참을 고하기도 입을 다물기도 싫다면 어찌하라는 것인가?
그는 언젠가 참을 고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너희들이 왜 세계를 구원할 수 없었는지 알고 있어?”
클라우스트라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끝까지 외면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다는 따위의 생각을 한 것도 같았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럴 수 없는 종류의 존재였다. 너무나도 유약하고 또 유약해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비밀임을 알면서도 그 비밀마저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헛된 희망. 클라우스트라는 그 희망을 삼키고 또 뱉어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떤… 까닭이 있었던가요.”
“그래, 이유가 있었지… 너희들은 전혀 예상할 수 있을 리 없었던 이유가.”
“대체 그것이 무엇인가요? 저희에게 클라비스에 미달하는 결격 사유가 있었습니까?”
“아니, 그런 것 따위는 없었어, 다행히도… 아니면 안타깝게도.
너희들이 세계를 구원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해. 내가 너희를 패배로 이끌었다는 것. 나는 라비린토스와의 결전에서, 너희를 배신했고… 우리는, 또는 너희는 패배했지. 그래… 그게 전부야. 아하하… 그런 이야기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나를 거둬 준 너희를 배신하고, 내가 세계를 멸망시켰다는, 그런 이야기.”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간신히 진정시켰던 몸에서는 다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끝은 제자리에 있을 줄 모르고 진동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갈 곳을 찾을 수 없어 차라리 눈을 감고 있었다. 추웠다. 견딜 수 없이 지독히도 추웠다. 찰나의 영원성을 느끼기에도 그의 영혼과 육신은 너무 지쳐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그 마지막이… 네 녀석 소행이었다는 것이냐?”
“맞아, 내가 한 짓이야. 있잖아, 사실… 나는 너희들이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할 때 기뻤어. 추악하게도 말이지…. 내가 너희를 배신했음은 이미 자명한 사실인데, 그 사실 너희들이 잊어버렸다고 없는 일인 셈 친 거야.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었던 마냥, 그때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믿으면서. 이미 모든 걸 망쳐버린 건 결국 나인데. 사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기를 바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깨달으면 너희는 다시는 나를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너희는 나 같은 녀석보다 훨씬 똑똑하니까… 전부 이해하고 있겠지, 지금도. 아하하, 마지막까지도 용서받기를 바라는, 이렇게나 끔찍한 나를 이해해 달라고는 말할 수 없어.”
“거짓말….”
누구의 목소리인지조차 분별할 수 없었다. 그저 사라지고 싶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들 앞에서 깔끔하게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가 가장 잘 알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을 끝내는 것은 허용범위 내일까? 태양이 저 너머로 다 떨어져 버렸기에, 흔들리는 시선으로는 친구들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떨리던 혀끝으로는 허탈한 웃음만이 비어져 나왔다.
“그러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매일 밤 빌고 또 빌지만, 나는 또다시 그때가 된다 해도 오로지 그 선택을 할 수밖에는 없어…. 그때는 진리가 소중했었으니까. 그 결말에 무슨 파멸이 있는지도 모른 채로. 말했듯이, 너희에게 이해를 바랄 생각은 없어. 감히 그래서는 안 됨을 이미 알아. 그러니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말은… 나를 원망해. 테네브리스를 원망해서는 안 돼. 이제는, 운명 따위가 지배하는 세계가, 이미 되어버렸으니까…. 운명에 거역할 수는 없어져 버렸어. 그러니 나를 원망하면서 살아, 어차피 쉬운 일이잖아, 그렇지? 싸워나가는 걸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 그런 나를 원망하면 되니까. …이것도 위선이겠지, 그럼에도 정말로 이제는 너희가 살아가기를 바라….”
아무런 의미 없는 말이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거짓말이라는 말 다음은 무얼까? 칼이 먼저? 화살이 먼저? 아니면 마법? 신성력? 그도 아니면….
거짓말이라는 말 다음으로 가장 먼저는, 치사량을 훌쩍 넘기는 극독.
그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제가 그러고도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믿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알고자 했던 진리는 홀로 묻어버린 채로, 바뀌어 버린 우주 원리는 자신의 결말을 예견했는지. 마지막에 비치는 것이 주마등일까, 그렇다면 그는 그 주마등 너머로 얼핏 친구들의 비명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들었겠지. 아무도 자신을 반기지 않는 것이, 지독히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두려워서 도망쳐 버린 이의 주제에는 잘 맞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죽는 게 두려워 먼저 자기 자신을 죽여 버린 이의 주제에는.
“…배신자.”
지독한 후회를 살다 어리석게 죽어 간 이의 말로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박명마저 모두 져 버린 시간이었지만, 의식 너머로 노을이 번지는 듯했다. 인생이란 역시 최악이었다.